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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4)제80화 한일회담(4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평화선에 대한 차철근씨의 증언계속이다.
『한일회담이 시작되던 51년 후반무렵 한국수역의 어장에는 한국배 보다 일본어선이 훨씬 많았다.
6·25동란으로 우리 어업은 그나마 명맥이 끊기다시피 된 반면 일본어선은 우리수역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격이었다.
뜻 있는 수산인이라면 이런 현상에 분노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일본어선의 무분별한 남획을 막고 어족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니 때마침 중남미각국에서는 해안자원보존과 대륙붕선언이 한참 일고 있었고 여기에 힌트를 얻어 우리도 「어업관할수역」을 확정해야 하겠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처음 어업관할수역을 긋기 위한 자료수집과 함께 국내의 이름있는 국제법학자를 비롯한 법조계와 외무부등 관계인사들과 이 문제에 대해 접촉을 했으나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이「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은 영해 3해리와 공해자유원칙이 대세였기 때문에 무리도 아니였다.
하지만 과거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 어업자원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9년 총독부령으로 「트롤어업 금지구역」을 설정해 한국어선의 조업을 규제했던 일도 있었다.
바로 이 예를 거꾸로 일본측에 뒤집어 적용한다면 그들도 지은 죄가 있는지라 무턱 댄 망발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관할 수역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정밀한 어장도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동남해의 경우는 과거 일본의「트롤어업금지구역」등의 참고자료가 있어 큰 문제가 없었으나 서해쪽은 변변한 어장도 하나 없었다.
우리 서해는 당시만 해도 조기·도미 등의 비교적 고급 어종이 많이 찾아오는 황금어장이라 어장도가 곡 필요했는데 그것이 국내에는 없었다.
한가닥 희망은 과거 한국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갖고 있을 어장도를 입수하면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느냐가 문제였다.
서해어장도 입수는 그러나 엉뚱한 곳에서 그 기회가 찾아왔다.
50년6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어선과 자재구매를 위해 동경에 머무르고 있던 나 (차철근씨) 는 북해도 대학 1년 후배로 일제 때 한국의 수산업계를 주름 잡았던 대양어업주식회사의「나가이」(영정) 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나중에 관계를 떠나게 되면 수산업을 직접 해보고 싶은데 혹 서해 어장도를 구할 길이 없겠느냐.」 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용케도 「나한테 서해어장도가 한벌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쩌나 고마왔던지 그 친구를 끌다시피 요정에 데리고 가 호주머니 돈을 몽땅 털어 술을 대접한 뒤 그렇게도 찾던 어장도를 손에 넣게 되었다.
후에 나는 그 친구에게 어장도의 사용목적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은게 마음에 걸려 사과도 할겸 찾았지만 불행히도 일찍 타계해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에 대한 미안감이 남아있다.
어업관할수역 확정작업은 이런 곡절을 거쳐 마침내 51년 초 성안되었다.
이 안을 들고 당시 경무대의 임철호비서관과 외무부의, 김동조정무국장을 찾아가 내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안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지식을 갖고 그후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특히 김국장은 내가 원래 일본과의 정치적 분규를 피하기 위해 어업관할수역의 원안에는 넣지 않았던 독도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극력 주장해 이를 추가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중에 외무부 안으로 확정되면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변형태씨 이름을 붙여 이른바 「변형태 추가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침내 51년9월7일 항도 부산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어업보호수역」으로 이름을 바꾼 최초의 평화선 안이 의결되었다.
이튿날 임비서관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난 이대통령은 「일본사람이란 원래가 악착같고 또 염치가 없는 민족이니 이런 방법이라도 안쓸 수 없지…」라는 말로 이 안을 일단 구두재가 했다. <계속> 유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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