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88세 청년'] 10. 유석 조병옥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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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병옥 박사(왼쪽에서 둘째)가 기자회견에서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조 박사 왼쪽 옆에 서 있는 사람이 필자.

나는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곧바로 유석 조병옥 박사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내가 조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50년 2월이었다. 조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필리핀.미국.캐나다.영국.프랑스를 방문하고 귀국한 직후였다. '고려시보' 사장이던 나는 고려시보 주최 시국 강연회에 조 박사를 연사로 초청했다. 강연이 끝난 뒤 지역 유지들과 함께 조 박사를 개성 제일의 요릿집인 '송월관'으로 모셨다. 서울에서 온 고위 인사들은 개성에 왔다가 얼굴만 비치고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조 박사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봉선화'라는 노래까지 부르며 개성인들과 어울렸다. 나는 그때 조 박사의 인품에 반해 버렸다.

조 박사는 나의 정치적 후견인이자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조 박사가 이끄는 민주당 구파의 일원이 된 나는 매일 조 박사의 자택인 돈암장으로 출근했다. 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무 당직도 맡지 않고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내 아호도 조 박사 덕분에 생겼다. 그가 어느 날 "민 의원, 민 의원 하고 부르기 불편한데 아호는 없는가"하고 물었다. 곧바로 작명가를 찾아가 호를 지어 달라고 했다. 작명가는 "부친의 호가 뭐였느냐"고 물었다. '춘강(春崗)'이라고 대답하자 작명가는 "그럼 민 의원께서는 '소강(小崗)'으로 하시라"고 권했다. 그때부터 나는 소강으로 불렸다.

59년 말 조 박사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조 박사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갑자기 병을 얻어 60년 1월 29일 수술을 받으러 미국으로 떠났다가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그해 2월 15일 서거했다. "건강해져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선거에 매진하세요. 자유당 독재를 끝내야 합니다"라고 다짐하던 조 박사의 형형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미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 조 박사는 내게 대통령 선거자금 1500만환을 맡겼다. 이때 나에 대한 조 박사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절감했었다.

61년 2월 14일. 조 박사의 1주기를 맞아 고인을 기리는 음반을 만들어 헌정했다. 음반에는 조 박사가 애창하던 '매기의 추억' '봉선화'와 추모 합창곡, 그리고 내가 녹음한 애도사 '아아! 유석 선생' 등이 담겼다. 2003년 6월 30일엔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유석 조병옥 박사 기념사업회'에서 만든 조 박사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다.

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7.29 선거에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민주당이 집권했다. 집권당은 신.구파로 나뉘어 극렬한 파벌 싸움을 벌이다 끝내 분당으로 치달았다.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민주당의 내분은 5.16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 학생의 피로 이룩한 민주당 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지는 길을 걷게 됐다.

나 역시 5.16의 충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5.16 주체 세력은 나를 구정치인으로 규정했다. 국회 해산 조치로 나는 의원직을 잃었다. 이때부터 국회도서관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5.16의 거센 파도 속에서 겪은 뼈아픈 아픔 중의 하나는 33년 고향 개성에서 창간된 '고려시보'가 강제로 폐간된 것이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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