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6)-제80화 한일합방(35)-전석천-연합군사의 간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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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가 일본에 있던 5척의 선박을 가져올수 있었던건 전적으로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측의 협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SCAP측은 이 5척의 선박을 양도하면서 나머지 선박들도 소재가 확인되는대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불과 6개월뒤인 47년초 SCAP은 종래의 그들의 결정을 번복, 우리가 되찾아온 5척의 배를 다시 반환하라고 요구해왔다.
SCAP측은 그 이유로 『당초 치적주의에 의해 한국에 선박을 반환했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며 속지주의(수역주의)로 처리했어야 옳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두가지 다 국제법이론으로 근거를 갖고있는것이긴 하지만 사실을 말한다면 종전직후 일본에 원리원칙을 내세웠던 SCAP이 점차 일본측과 이해를 같이하게되면서 그들의 태도가 한국보다는 일본을 더 중요시하는쪽으로 변화한 결과였다.
선박문제는 그후 한 1년동안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48년 정부수립직후 김용주씨등 해운계 인사들이 일본의 어딘가에 아직도 있을 한국선박을 기어이 찾아오겠다는 열의로 이 문제를 다시 정부에 건의하면서 표면화됐다.
이에따라 49년4월초 김씨를 단장으로 홍진기법무부법무국장, 황부길교통부해운국장, 오진호상공부수산국장대리등으로 구성된 대일선박회담사절단이 도일, SCAP측과 교섭에 나서게됐다.
그러나 SCAP측은 우리가 이미 예상했던대로 『일본의 해외재산은 45년8월9일 현재 소재한 지역에 귀속한다』는 속지주의를 들고 나와 한국이 가져간 5척의 조선우선소속 선박도 일본에 도로 돌려보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맞서 우리측은 치적주의냐, 속지주의냐 하는것은 개인과 법인의 적용이 다르며 조선우선이 현재 한국에 존속하고 있는 법인인만큼 그선박은 당연히 한국의 법인자산이라고 맞섰다.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SCAP측은 『속지주의는「맥아더」사령관의 지상명령』이라고까지 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고집했다.
뿐만아니라 나중에는 『선박은 무기에 속하는 물자이므로 한국에는 더이상 선박을 돌려줄수없다』는 궤변까지 들고나와 교섭은 도리없이 결렬될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일본에 머물러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대표단은 일단 귀국한 뒤 상의끝에 교섭대상을 직접 미국무성으로 돌리기로 하고 이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대표를 워싱턴까지 보냈다.
이대통령은 당시 「트루먼」미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성과 주일·주한미당국에 이문제에 관한 서신을 여러차례에 걸쳐 띄우기도 했다.
우리대표들은 1개월동안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장면주미대사와 함께 국무성과 접촉해 보았지만 그들은 『SCAP이 집행하는 일은 국무성소관밖의 일』이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일뿐이었다.
이처럼 여건이 우리쪽에 불리하게 기울어져있을 무렵 6·25가 일어났고 SCAP당국은 전화에 시달리는 한국의 형편을 고려해 한일회담 개최기운이 무르익어가던 51년 9월11일 외교각서 2168호를 발표, 일본은 45년8월9일 현재 한국치적의 모든 선박을 즉시 반환하고 양국은 이문제를 위한 교선을 개시토록 일본측에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은 배경속에서 이루어진 선박회담인 만큼 일본측이 처음부터 고분고분하게 우리측 주장에 귀를 기울일리는 만무했다.
일본측은 전구한대로 『SCAP각서 2168호는 한국측의 일방적인 열망에 SCAP이 일단 부응한것이긴 하나 우리는 우리대로 각서내용및 이에따른 절충한계를 놓고 SCAP측과 별도로 협의를 가질 계획인만큼 의제의 명칭은 「선박반환건」으로 포괄적으로 할것』을 고집했다.
이에 덧붙여 일본측은 『SCAP이 한국에 돌려준 5척의 선박은 일본소유이므로 한국이 이를 다시 반환해야한다』고 강변하면서 이문제 역시 의제에 포함시킬것을 요구해왔다.
뿐만아니라 종전이후 공해상에서 어로중이던 일본어선 다수가 한국정부에 의하여 불법나포 되어있다면서 이문제도 의제에 포함시켜 함께 다룰것을 주장했다.
우리대표단은 이같은 일본측 주장이 회담진행을 늦추려는 일종의 지연작전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주장이 억지임을 증명시키면된다는 판단에서 4차회의에서 이들의 주장도 일부를 의제에 포함시키기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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