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야만"을 잡았다|ICAO 대소규탄 결의안이 통과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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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몬트리올=장두성특파원】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국제민항기구 이사회 결의안의 통과 전망은 처음부터 낙관적이었다. 첫날 대표들의 발언내용에서 이미 대다수 국가들은 이번 참사가 자기들에게도 일어날수 있는 국제민항의 안전에 대한 중대 위협임을 절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런 공통된 위협 의식이 국제정치무대에서 소련이 갖고있는 영향력과 마찰할 때 어떤 표결 결과를 가져올 것이냐는 의문이 규탄결의안을 입안한 관계자들의 신경을 쓰게 했다. 그런 배려는 결의안의 내용을 강경하게 해서 간신히 통과시키느냐, 아니면 내용을 대부분의 대표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약화시켜서 대다수 지지로 통과시키느냐는 두 갈래 의견을 자아냈다. 결국 대다수 지지를 위해 내용의 농도를 묽게 한다는 쪽으로 결의안을 작성, 압도적 표차로 채택된 것이다.
○…16일 상오까지 공동 제안국들은 서방 11개국에 남미 7개국을 포함시켜 18개국을 공동제안으로 제출하기로 잠정 제합의가 이루어졌었다.
이를 위해 미리 마련된 서방측결의안 초안과 제3세계측 초안내용이 막후교섭과정에서 절충되었다.
그래서 ▲『민항기 파괴행위를 「규탄」한다』는 구절이 『깊이 개탄한다』로 바꾸어지고 ▲『국제법상 적절한 「배상을 할 필요성」을 인정하며』라는 구절은『민항기에 대한 이번과 같은 군사력사용은 통상적으로 인정되고 있는「법적 결과를 야기」함을 인정하며』로 바꾸어졌으며 ▲『소련의 공식성명이 이사건의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지 않은 것을 「개탄」한다』는 구절은 『민항기의 안전에 대해 소련이 최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우려」한다』등으로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일 정오(현지시간) 소련이 자기측 결의안 초안을 제출하자 공동제안국에 가담하려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빠져나갔다.
그래서 이 결의안은 서방 11개국 공동발의로 제출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공동발의는 하지 않았지만 표결에는 빠짐없이 합류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내용절충이 실질적으로는 효과를 본 것이다.
○…소련측은 자기측 결의안에 처음부터 자신이 없었는듯 하오 회의 때부터 토의지연·표결지연작전을 폈다.
소련의 방해시도는 소련이 이날 상오 회의에서 서방축 결의안에 반대되는 자기측 결의안을 전격 제출함으로써 막이 올랐다.
소련이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의외였다. 소련이 국제적 여론의 비난 때문에 자기옹호를 위한 결의안을 낸다해도 체코 또는 다른 제3세계 국가를 동원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너무나 용납하기 어려운 성격의 비극이어서 소련의 위성국가조차도 그런 불명예스러운 멍에를 지기를 불원했는지 아니면 어차피 패색이 짙은 분위기를 보고 자기 입장이라도 밝히려 했는지도 모른다.
캐나다가 제의한 서방측 공동결의안은 ICAO문서 7696호, 소련 결의안은 7697호로 지정되고 먼저 제출된 서방결의안이 토의되기 시작한 것은 하오3시(현지시간=이하 같음·한국시간 17일 상오4시)였다.
패색이 짙음을 직감한 공산권의 첫 방해시도는 체코대표로부터 나왔다. 체코대표는 이사회의사규정 42조A5항에 규정된 『동의안 토의를 일정기간 또는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는 조항을 거론, 이 토의를 무기한 연기하자고 제의했다.
이 결의안에 관한 본국정부와의 협의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의장이 일정기간 연기냐, 무기한이냐고 되묻자 체코대표는 『무기한』이라고 답변했다.
본국정부의 회담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이 말로 체코대표의 진의는 모든 대표들에게 분명해졌다.
그런데 다행히 이조항의 D항에는 『이상의 문제는 다수결로 정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하오4시25분 토의연기여부에 관해 표결한 결과 찬성2, 반대24, 기권5표로 부결됐다. 과반수인 17표를 7표나 초과한 안전권을 서방측이 획득한 것이다.
이로써 소련의 1차 방해기도는 실패했다.
○…그 다음시도는 알제리대표에게서 나왔다.
알제리는 서방 결의안과 소련 결의안을 비교해 보니 비슷한 점이 많다고 주장하고 제3국으로 하여금 두 결의안을 절충한 제3결의안을 작성케 하자고 제의했다.
정반대입장을 담은 두 결의안을 합치자는 이 어처구니없는 제외는 의장이 의사규정위반이라는 이유로 기각됐다.
체코의 연기동의안이 부결된 순간부터 발언자들은 짤막하게 서방결의안에 대한 지지의사만을 표시하는 연설을 연이어했다.
베네쉘라·파키스탄·브라질 순으로 연달아 지지의사가 표명되자 소련대표가 발언권을 얻어 마지막으로 자기변호를 했다.
소련대표 「오를로베츠」는 『사건의 원인이나 소련영공 침범사실이 명시되지 않아 이 결의안을 반대한다』고 했다.
○…소련측의 다음 방해시도는 인도대표에게서 나왔다. 인도대표는 서방측 결의안이 균형을 잃었다고 비판하고 ICAO회의규정 49조에 의거한 표결방식을 제의했다.
이 규정은 『회원의 요청이 있고 다수결에 의한 반대의사가 없으면 동의안을 부분별로 분리 표결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인도대표는 서방측 결의안을 조항별로 별도 표결하자고 제의했다.
인도대표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표결방식은 서방측이 이틀동안 어렵게 모은 제3세계의 지지표를 분산시키는 결과가 올 가능성이 컸다.
인도측의 제안에 뒤이어 소련대표는 분리표결에 앞서 결의안을 조목조목 떼어서 토의하자는 주장을 인도동의에 대한 수정안으로 제기했다.
표결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과 정비례해서 소련의 방해작전도 열기를 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의안의 분리표결 제의에 대한 표결은 하오5시10분에 실시되었는데 결과는 찬성5, 반대23, 기권이 2표였다.
이로써 서방결의안에 대한 지지표가 23과 24(연기안 반대표수)표 사이에 안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고 한국대표는 물론 서방대표들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나타났다.
○…하오5시30분. 이틀동안의 열띤 토론을 종결짓고 이번 소련만행을 처음으로 국제기구의 결의안을 통해 규탄하는 표결이 드디어 구두표결로 시작됐다.
표결결과는 찬성26, 반대2, 기권3이었다. 반대는 소련과 체코뿐이고 기권은 인도·알제리·중공 등 세나라였다.
기권한 나라들은 모두 표결후 기권한 이유를 변명하는 발언을 했다. 이들이 소련에 밀착해 있지만 이번 사건이 불러일으킨 국제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맨먼저 중공대표가 자기정부는 이사건과 관련해서 민간여객기의 안전에 관심이 많지만 이번 결의안은 논란이 많고 미확인된 점이 많아서 기권했노라고 말했다.
인도대표는 이번 사건이 충격적이며 희생자에게 조의를 표한다고 거듭 말하고 자기는 결의안을 무난히 해결하려 한 것이지 토의를 지연시키려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표결결과를 조용히 지켜본 박근대표는『소련을 포함한 모든 대표들이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한데 감사한다』고 말하고 이번 결의안은 한국측 기대에 크게 미달하지만 한국국민의 감정보다 이 기구의 협조분위기를 생각해서 이 결의안을 수락하며 투표해 준데 대해 감사한다고 정중히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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