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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디자이너 미켈레 발탁 … 구찌의 도박 이번에도 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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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것은 도박이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브랜드 ‘구찌(Gucci)’의 창조 부문 총괄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이하 CD)로 임명된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42) 뉴스를 전하면서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렇게 표현했다. 실제로 미켈레는 10여 년을 다른 스타 디자이너의 그늘에 가려 보좌 역할에 머물던 이였다. ‘미생(未生)’ 패션디자이너가 ‘완생(完生)’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의 구찌 CD 임명 소식은 ‘깜짝 뉴스’였다.

 명품업계에서 자웅을 겨루던 기존의 스타 디자이너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실적 부진이나 스캔들 등으로 하차하거나 자리를 옮겼다. 세계 패션계와 글로벌 명품업계의 올해 지형도를 명품 브랜드의 얼굴인 스타 디자이너의 인사(人事)를 통해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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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업계 ‘대마(大馬)’ 구찌의 파격 인사=본래 명품업계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타’ 디자이너들이 명성을 쌓으며 유명 브랜드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10여 년을 구찌에서 일한 미켈레는 회사 밖에선 인지도가 거의 없는 인물이다.

 도박이란 표현은 최근 구찌의 좋지 않은 영업실적도 반영된 결과다. 브랜드가 속해 있는 세계 3위(매출 기준) 명품그룹 ‘케어링(Kering)’은 지난해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3.3% 증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룹 전체 이익의 절반 정도를 책임지는 구찌 매출은 1.6% 줄었다. 신임 CD인 미켈레는 이런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게 됐다. 미켈레는 전임자였던 패션디자이너 프리다 잔니니(Frida Giannini·43) 밑에서 액세서리 분야 수석디자이너로 일했다. NYT는 “구찌가 스타 디자이너의 힘을 활용하는 업계의 일반적인 전략과는 정반대로, 브랜드 자체 파워에 기대게 생겼다”고 설명했다.

 사실 구찌는 이제까지 ‘스타 디자이너’ 덕을 가장 많이 본 브랜드다. 구찌의 스타는 톰 포드(54)였다. 2004년 구찌를 떠났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히 화제가 되는 인물이다. 포드는 구찌가 프랑스 브랜드 ‘루이비통’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명품업계를 쥐락펴락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1980년대까지 구찌는 라이선스 남발, 구치(Gucci) 가문 후손들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나날이 쇠락해 가던 터였다. 94년 경영 수완이 좋은 사업가 도메니코 데 솔레(Domenico De Sole) 당시 구찌 회장이 포드를 CD 자리에 앉혔다. 데 솔레는 포드를 앞세워 브랜드를 재정비하며 오늘날 구찌의 기반을 다졌다. 영입 당시 포드도 무명에 가까운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그는 배우 뺨치는 외모와 매혹적인 디자인으로 여심을 흔들었다. 대중 노출을 즐긴 그는 자신이 직접 광고까지 감독하며 90년대 후반 본격화된 ‘디자이너=스타’ 전략의 아이콘이 됐다.

 프랑스 브랜드 ‘루이비통’의 CD로 16년 동안 재직한 패션디자이너 마크 제이컵스(Marc Jacobs·52)도 스타 전략의 대표적인 예다. 제이컵스 이전 루이비통은 전통에 얽매여 보수적 느낌이 강했던 브랜드다. 스타 디자이너 제이컵스는 이를 젊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변신시키며 2013년 말까지 루이비통을 이끌었다. 스티븐 스프라우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현대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낡은 이미지의 루이비통 로고를 화려한 색감으로 탈바꿈한 것도 제이컵스의 아이디어였다. 2003년 ‘제이컵스와 루이비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루이비통=마크 제이컵스’라는 스타 시스템은 공고하게 유지됐다.

 ‘포드=구찌’ ‘제이컵스=루이비통’이란 공식은 2000년대 명품 패션계에서 성공방정식으로 통했다. 포드는 구찌를 떠난 이후에도 스타라는 명성을 활용해 자신의 브랜드 ‘톰포드’를 안착시켰다. 최근엔 화장품 분야로도 사업을 확대했다. 포드는 2009년엔 ‘싱글맨’의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 1994년부터 10년 동안 구찌 CD로 브랜드를 혁신해 루이비통과 자웅을 겨루는 현재의 구찌로 만들었다. [중앙포토]

 ◆스타 CD 하나로 확 바뀌는 브랜드 콘셉트=명품업계 전문가인 밈마 빌레지오(Mimma Viglezio)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명품 브랜드가 스타 CD를 교체하는 이유는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그는 “명품 소비자들 중에서 젊은 층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브랜드 사이에 차별점이 없어진 데 실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명품 소비자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스타 디자이너’로 브랜드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전략이 명품업계의 ‘인사(人事) 마케팅’이다. 명품업계의 인사 마케팅은 2012년부터 본격화됐다.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한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 ‘겐조(Kenzo)’, 이탈리아 방직기업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이하 제냐)’, 스페인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1895~1972)의 유산인 ‘발렌시아가’ 등이 이런 전략을 좇았다. 빌레지오의 지적처럼 판매 감소세를 극복하는 이미지 쇄신 카드로 브랜드에 새 CD를 영입하고 있는 것이다.

 ‘겐조’엔 ‘오프닝 세레모니’라는 2명의 기획자가 CD로 임명됐다. 중국계 미국인 남성 움베르토 레온(Humberto Leon·40)과 한국계 미국인 여성 캐럴 림(Carol Lim·40) 듀오다. 이들은 2002년 미국 뉴욕에 감각적인 패션 아이템을 모은 콘셉트 매장 ‘오프닝 세레모니’를 열어 큰 인기를 얻었다. 듀오는 2012년 7월 겐조 CD를 맡아 브랜드를 변신시키고 있다. 2013년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웨트셔츠가 이들의 작품이다. 가슴 부분에 브랜드 로고가 크게 새겨진 디자인으로 젊은 층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제냐’는 질 좋은 원단 생산업체에서 고급 남성복 브랜드로 거듭난 지 10여 년 만에 스타 디자이너를 데려왔다. 패션디자이너 스테파노 필라티(Stefano Pilati·50)가 주인공이다. 제냐는 100여 년 동안 고급 원단을 생산해 온 업체답게 기성복의 품질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개성 넘치는 패션 브랜드 사이에 가려져 있었다. 필라티는 톰 포드의 뒤를 이어 2004년 이브생로랑(YSL)의 CD가 됐고 2012년 9월 제냐에 영입됐다. 필라티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1000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패션쇼를 열며 제냐를 혁신 중이다. 필라티 시대 전까지 소규모 상품 설명회만 열었던 ‘제냐’와는 확 달라진 모습이다. 브랜드 ‘발렌시아가’는 스타 디자이너의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다. 2012년 12월, 발렌시아가를 운영하는 케어링그룹은 새로운 CD로 대만계 미국인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32)을 지명했다. 왕의 나이 30세 때였다. 2007년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한 그는 미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A) ‘올해의 디자이너상’ 등을 받으며 20대 중반 스타덤에 올랐다. 왕은 젊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아이돌급’ 패션디자이너다. 그의 스타성에 힘입어 발렌시아가는 패션쇼를 열 때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브랜드의 예전 명성을 빠르게 회복 중이다. 왕은 지난해 말, 대중 브랜드 ‘H&M’과 협업해 젊은 팬들과의 접점을 더욱 늘리며 100년 남짓한 브랜드의 회춘을 이끌고 있다.

 또 다른 스타 디자이너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44)의 행보는 명품 브랜드의 인사 마케팅이 제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 준다. CD로 15년 동안 발렌시아가를 진두지휘한 제스키에르는 2013년 루이비통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3월, 루이비통에서 자신의 첫 컬렉션을 발표한 그는 새로운 모양의 가방을 내놨다. 루이비통의 각진 모양 여행가방을 핸드백 사이즈로 줄인 ‘프티트 말’이다. NYT는 지난주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의 지난해 영업이익이 1년 전보다 64% 증가했다는 실적을 발표한 기사에서 이 가방을 “제스키에르의 히트작”이라고 전했다. “브랜드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여준 덕분에 온갖 시상식의 레드 카펫을 점령했다”는 설명도 붙였다. 구찌의 새로운 시도가 스타 CD를 앞세운 명품업계의 이런 인사 마케팅을 흔들 수 있을까. 이 역시 실적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명품의 성패도 역시 돈에 달렸다(Money talks).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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