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now] 한해 6650만 끼 무료 식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늦가을 아침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파리 북동부 19구의 크리메 거리를 찾았다. 사회봉사센터 건물로 쓰이는 170번지 앞에 이르자 유모차를 밀고 온 흑인 여자 10여 명을 비롯해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이들은 저마다 녹색 카드를 손에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차례를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랑의 식당'이라는 동그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 곳곳에서 극빈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자선봉사단체의 로고다. 현관 안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녹색 카드에 표시를 하면서 극빈자들에게 우유.빵.버터 등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었다. 식품상자 포장에는 유럽연합(EU)이 지원해 줬다는 마크도 보인다. 옆방에서는 치약.비누.샴푸 등 위생용품을 나눠주고 있다.

물건을 받아 나오던 부케니미 말리카는 "이곳이 없으면 우리 가족은 먹고살 수 없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랑의 식당은 1985년 10월 14일 출범했다. 설립한 이는 배우였던 미셸 콜뤼슈. 그는 85년 9월 자신이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봉사활동을 해도 대환영이라고 했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기부금을 내겠다는 사람과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이었다. 사랑의 식당은 그 해 12월 21일 처음 문을 열었는데, 이날 참여한 자원봉사자가 5000명을 넘었다. 이후 참여 열기가 더욱 높아져 그해 겨울 노숙자를 비롯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850만 끼의 식사를 제공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사랑의 식당은 프랑스 자선단체의 대명사가 됐다. 지난해에만 6650만 끼의 식사를 베풀었다. 배식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는 4만3000여 명, 한 해 기부금만 3700만 유로(약 467억원)에 달한다. 유언장으로 재산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사랑의 식당은 요즘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랑의 일터'운동과 노숙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 주는 '모든 이의 쉼터'가 대표적이다. 가난한 아기 엄마와 임신부를 돕는'사랑의 아기 식당'도 최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120여 곳에 자리를 잡은 사랑의 아기 식당은 식품뿐 아니라 아기옷.잠자리.육아 등 엄마가 필요로 하는 모든 도움을 제공한다. 보육사.간호사.소아과 전문의.사회봉사자 등 전문가들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한다.

그러나 요즘 사랑의 식당은 큰 고민에 빠져 있다. 경기 탓인지, 세태가 각박해진 때문인지 기부 행렬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협회 관계자는 "올 겨울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