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는「잔혹의 이념」인가…|KAL기 격추만행-소련에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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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최근에 귀국에서 발간한 한국에 관한 매우 놀랄만한 학술적 연구서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작년에 모스크바예술출판소에서 출판한 고대로부터 19세기말까지의「한국예술」에 관한 책으로 저자는 근 50년동안 국립동방예술박물관에 근무한「올리가·굴루하례바」라는여성이었다. 저자는 머릿말의 첫머리에서- 한국은 수천년에 걸쳐서 문명이 형성되고 발달된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문화국가중의 하나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비록 이념이나 정치제도는 다를지언정 인류의 문화유산이나 순수한 민족문화에 있어서는 뭔가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며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겠구나하고 내심 기뻐했었다. 그래서 귀국의 문화와 문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서로간에 가로놓인 인위적인 이념의 장벽은 제쳐놓고서라도 적어도 정신문화면에서의 이해의 가능성을 보는듯해서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설레임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귀국의 요격기 8대가 하등의 적대행위도 하지 않은 우리의 평화스러운 민간여객기를, 그것도 노상 장기항로를 따라 운항하는 비무장 여객기를 마치 미사일 실험이나 하듯이 무참히 격추시키고 2백69명의 고귀한 생명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러고서도 그에 대한 철저한 뉘우침도 없이 계속 만행을 은폐하려들고 있다.
어쩌면 이럴수가 하는 경악과 더불어 한가닥 귀국에 걸었던 나의 희망도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이때처럼 나자신의 학문에 대한 석연치 않은 회의를 느껴본적이 없다.
소련인들이여!
그토록 평화공존을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면서 또 남의나라를 그토록 제국주의니 침략주의니 하고 매도하면서 그같은 표리부동한 잔혹한 집단적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지, 당신네 공산주의의 정신구조가 지극히 의심스럽다. 학자들이 논하기를 러시아인의 정신속에는 극단성과 이중성과 모순성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말 어린이와같은 순진성이 깃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공산주의라는 괴물이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소련인들이여. 듣거라
우리의 이 조그마한 동방의 나라, 귀국의 학자도 말한 그의 지리적 조건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받아 숱한 시련을 겪은 이 나라는 그 근본이 평화롭고 인정이 넘친 나라였기에 한번도 남의 나라를 넘본 일이 없는 <신선한 아침의 나라>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온통 국민사이에 불신과 분열이 조장되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뭐가 그렇게 한많은 인간들이기에 프롤레타리아독제니, 폭력혁명이니, 계급투쟁이니, 인민의 적이니하여 순수한 이 나라 백성들에게「증오」를 심어주고, 마치「증오」를 먹고사는 사람들처럼 미친듯이 날뛰며 양민들을 학살한단 말인가…. 그것도 부족해서 당신네들의「스탈린」이 사주하여 우리의 역사상 도저히 지울수 없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조작한단 말인가.
소련인들이여!
나는 당신네들이 그 어느 나라에도 유례없는 처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타타르인의 침입과 지배, 그 비참한 농노제도, 황제들의 야수적인 정치, 폭력적인 유혈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제2차세계대전의 당사국으로 전쟁의 참상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겪었던 것이 당신네들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당신네들의 존경하는 작가「솔로호프」는 『인간의 비극』에서 묘사하지 않았던가. 전쟁으로해서 겪은 평범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말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나」의 고통은 있어서는 안되지만「남」의 비극은 있어도 무방하단 말인가.
소련인들이여!
나는 당신네들 선량한 국민이 역사적으로 위로부터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끝내는「고통」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달래기위해 곧잘 러시아인다운 익살로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던가. 다음과 같이 말이다. -어느날 공산주의의 시조인「칼·마르크스」가 당신네들의 나라에 다시 찾아와 모스크바 방송에 간곡히 출연을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연출자는 그러잖아도 당신의 이야기는 매일 방송되고 있으니 뭐 그러실것까지 없다고 만류했으나「마르크스」는 한사코 고집하길래, 한마디만 하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마르크스」는 마이크를 잡더니 조용한 목소리로『만국의 노동자여, 나를 용서해주게나! 』하고 말했다고 당신네들은 쉬쉬하면서 넉살을 부리지 않았던가.
소련인들이여!
나는 당신네들의 기지에 넘치는 이러한 넉살을 사랑하며 그것이 대부분의 소련인들의 진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는 믿는다. 소련이 저지른 이번의 만행은 가장 처참한 국민사를지녔던 소련인 전체의 양심과는 상관없다는 것임을. 또 나는 믿는다. 19세기의 러시아의 양심을 이어받은 소련의 지성인들이 결코 이 살인적인 행위를 그냥 묵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철<외대노어과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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