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7)|제80화 한일회담(6)|유진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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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0년 후반과 51년초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정부지도자들과 대일강화조약초안을 협의했던 「덜레스」 미국무장관 보좌관의 초안이 51년3월말 우리측에 알려졌을때 그 내용을 보고 대경실색했다는 얘기는 이미 말했다.
초안에는 우선 우리와 가장 이해가 깊은 귀속재산처리에 대해서는 일반론만 있었지 한일간의 귀속재산문제에 관해서는 일조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이 조약에 따라 장차 적용받게 될 조항이 어떠어떠한 항목인가를 규정한 조항도 없었다.
나는 초안이 보도된 이상 중요 이해국인 우리나라에도 그 초안이 송부되어 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안의 중요성으로 봐서 워낙 시간을 다투는 문제라 장면총리를 만나기로 했다.
마침 수일전에 주미대사로부터 귀국, 새로 취임한 장면 국무총리를 만났을 때에 『언제든지, 무슨 일이든지 나를 만날 일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만나겠소』 하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새로 외무장관에 임명된 변영태씨는 유엔대표로 가서 귀국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초안내용을 안 그 이튿날 나는 경남도청(당시 부산이 피난임시수도였음) 안에 있던 총리실로 장면박사를 찾아 갔다.
반가이 맞아주는 장박사에게 나는 다짜고짜로 강화조약 초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우리 정부로서는 시급히 의견서를 작성해 보내야할 필요성을 말했더니 장총리도 내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그렇다면 미국정부에서 보내온 영문으로 된 초안사본이 있어야 정확하게 우리의 대처방안을 세울 수 있을 터인데 그런 것이 우리 정부에 와 있는지 어떤지를 장총리도 모르고 있었다.
장총리가 비서관을 시켜 사방으로 알아 보았으나 그런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별도로 정부쪽에서도 이문제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만들어 반영시켜야 한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홍진기법무부 업무국장은 김준연법무장관에게 건의해 이문제를 대통령에게 말씀드리도록 했다. 재한 일본인 재산(귀속재산)은 미군정법령 제33호에 의해 미군정청에 귀속·소유됐다가 한미협정에 의해 대한민국에 이양됐으나 이것은 한미간의 일이고 일본측에서는 그 가운데 일본인의 사유재산은 헤이그조약 제46조 사유재산몰수금지원칙에 의해 몰수될 수 없으므로 상기「귀속」조치로 몰수하는 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당시 일본신문의 보도)하고 있었다.
때문에 평화조약속에 이에 관한 규정을 넣어 한미간의 귀속재산 처리를 승인시켜야 후환이 없을 것이고 그 밖에도 재일교포문제·어업문제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김장관이 이러한 점을 주장하자 이 대통령은 앞서 말한 것처럼 「맥아더」 장군의 이야기를 하며 불필요하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김장관은 다시 조병옥내무장관을 설득해 홍국장과 함께 장총리에게 이에 관해 설명했는데 장총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던 것은 물론이다.
장총리에게 이 문제를 제기한뒤 나는 정부쪽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결국은 우리로서도 반드시 그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해야될 것으로 생각해 바로 의견서 작성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관인의 신분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외교당무자도 아니었던 내가 어줍잖게 이일에 뛰어든 것은 사안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었지 어떤 공명심 때문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나름대로 준비에 착수한지 2, 3일후 장총리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총리실로 가 보았더니 장총리는 무슨 서류를 들고 『벌써 2주일전에 대통령앞으로 온 것을 어떤 비서가 서랍 속에 여태 처넣어 두었다는 구료. 쯧쯧…』하고 무척 못마땅해 했다.
서류는 물론 며칠전부터 찾던 미국 정부로부터 보내온 초안이었다. 나와 장총리는 국사를 이렇게 처리하는 일이 있나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주미대사관의 일 처리가 우선 못마땅 했다. 아무리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외교업무를 관장했다지만 주미대사관이 본부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이대통령에게 초안을 보내는 행위에 대해 내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대통령 비서관들도 그런 중요한 문서를 받고 2주일간씩이나 묵힌건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총리가 거론치 않았으면 얼마나 오래 서랍속에 잠들어 있었을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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