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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기생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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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봄.가을 대변 검사는 학교의 연례행사였다. 나이 든 세대 대부분은 "너는 회충" "너는 회충, 요충" 하며 선생님이 불러주시던 대변 검사 '성적표'를 기억한다. 어쩌다 "아무개는 회충.요충.편충" 하면 교실에선 '와'소리가 나곤 했다. 호명된 아이들은 줄지어 교탁으로 나와 화이자가 19세기에 개발한 하얀 알약 '산토닌'을 먹어야 했다. 회충은 삼십 알, 회충.요충은 오십 알… 성적에 따라 먹는 양도 달랐다.

기생충 퇴치가 본격화한 것은 1964년 한국기생충박멸협회가 창립되면서다. 2년 뒤 기생충질환 예방법이 제정됐고 69년에는 대변 집단검사가 시작됐다. 71년 84.3%였던 기생충 감염률은 97년 2.4%로 떨어졌다. 소임을 다한 대변 검사는 95년 폐지됐다.

최초의 대변 검사는 49년에 한 미국인이 방역연구소와 공동으로 했다. 그는 당시 인구 약 2000만 명의 회충 감염량을 5억~10억 마리, 열에 여덟은 감염자로 추산했다. 그 시절 어른들은 비쩍 마른 아이를 보면 "회가 동했다"고 했다. 기생충한테 몸 안의 영양분을 다 빨렸다는 것이다.

이런 기생충의 '효과'를 이용해 미국에선 촌충 다이어트가 유행하기도 했다.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가 촌충 다이어트로 54년 92㎏이던 체중을 2년 만에 60㎏대로 줄였다는 얘기도 꾸준히 회자됐다.

지구를 거대한 생물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은 79년 영국의 대기학자 제임스 러브록 박사가 내놓았다. 가이아(지구)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기생충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지구의 체온(대기)을 올리고 폐(아마존 유역 등 삼림지대)에 구멍을 내며 피(바다.강)를 오염시키고 뼈와 살(땅)을 갉아먹는다. 명탐정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은 28년 '지구가 비명을 질렀을 때'에서 한 과학자가 13㎞의 지각을 뚫고 속살을 찌르자 무시무시한 분노의 비명을 터뜨리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중국산 김치의 기생충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약국에선 구충제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70년대까지 득실대던 기생충은 인간이 구충제를 쏟아부으면서 '박멸'됐다. 지진과 태풍.홍수는 가이아가 즐겨 쓰는 구충제다. 요즘 들어 초대형 지진이나 허리케인이 잦아졌다. 이런 것들이 혹여 분노에 차 터뜨리는 가이아의 비명인 듯해 두렵다.

이정재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