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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 교수 파문 어떻게 볼 것인가] 서울대 박태균 교수가 보는 '강 교수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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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8.15 직후 한국사회에서 전체 국민의 70% 이상이 사회주의를 지지했는가?

이것은 분명 당시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수치다. 당시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이 다른 정당에 비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미 군정의 정치보고서에서도 나타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여론조사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한 사람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스탈린식 공산주의'는 아니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정치인들이 주장한 농지개혁과 친일잔재 청산은 이것을 반대하고 있던 보수적인 그룹들에 비해 국민에게 시대적 과제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에는 임시정부 내 조소앙의 삼균주의 역시 포함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곧 공산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지지로 해석할 수는 없다.

◆ 한국민주당이 친일파 정당이었는가?

8.15 직후 한국민주당에는 다른 정당에 비해 훨씬 많은 명망 높은 친일파가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미 군정이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도 나타나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친일파 정당으로 비난받고 있었던 정당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원세훈과 같은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왜 이들이 친일을 하지 않았던 정치인들과 결합하지 않았는가는 우리 정치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밝혀야 하는 사실이다. 이는 또한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군부독재의 잔재를 계승하고 있다고 비난받는 정당에 왜 개혁주의자들이 동거하고 있을까?

◆ 미군은 점령군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들어왔는가?

공개된 미 군정 관련 문서와 소련 문서들은 미국과 소련이 모두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한반도에 진주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떠한 외국군도 결코 우리 민족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충실했다. 만약 당시의 시대적 과제가 소련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았다면 소련은 결코 사회적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 대한민국 정부에는 친일파가 대거 참여한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독립운동가가 많이 참여했는가?

남한에 비해 북한에 더 많은 독립운동가가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통성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정통성은 결코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통성을 획득할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국민의 힘에 의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룩한 대한민국은 정통성을 획득해 나가고 있다. 이미 국제사회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다.

◆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는가?

분명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분단에 책임이 있다. 가만히 두면 좌우 대립에 의해 내전이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분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단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권을 세우려 한 외세에 편승하고자 했던 국내의 정치세력들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결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베트남의 역사는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상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강정구 교수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바로 강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수정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촉발된 수정주의적 시각은 한국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 현대사 연구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수정주의자들은 공개된 미국 문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커밍스로 대표되는 수정주의자들의 분석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수정주의자들의 논리를 극복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80년대 수정주의자들이 냉전의 논리에 도전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면, 이제 21세기 역사인식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인권의 가치 발현에 공헌해야 한다. 강 교수의 논지가 체제에 대한 논란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학문적 주장은 결코 사법적 판단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다. 학문적인 논의는 학문적 토론을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 학자의 주장에 대해 사법적 조치를 취하려는 움직임은 오히려 대한민국 체제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던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번 논란이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한 차원 높은 논의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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