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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그들은 …] 하. 북핵 영향…"한국도 핵무기 가져야" 6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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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 현실 이익 중시 가치관

한국인은 어떤 가치관을 지녔을까. 다른 나라 국민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국의 정치학자 잉글하트는 국가 발전의 목표에서 물가와 인플레 억제,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태도를 '물질주의'로, 언론자유 보장과 정부정책 결정에 국민의 의견수렴을 우선시하는 문화주의적 태도를 '탈물질주의'로 정의해 각 국민의 가치관을 비교분석한 바 있다. 이번 조사엔 잉글하트의 방법론에 따른 항목도 포함됐다. 여기서 물질주의는 '대한민국 국정운영의 화두가 주로 부국강병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탈물질주의는 경제보다 '참여와 인간적 가치, 환경 등 탈인습적 가치'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혼합형은 두 가지 모두에 어느 정도 긍정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척도를 이용해 분석해 본 결과 응답자의 36.7%가 물질주의자로, 5.8%가 탈물질주의자로, 나머지 57.5%가 혼합형으로 분류되었다.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된 국가 중 중국 다음으로 한국인의 물질주의자 비율이 높다. 물질주의자 비율은 중국.한국.독일.일본.미국.스웨덴 순으로 낮아진다. 독일의 물질주의자 비율이 높은 이유는 통일 후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강한 동독 주민들이 대거 표본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는 국민의 20% 이상이 탈물질주의자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들은 환경보호와 언론자유, 그리고 소수자의 인권보호 등에 매우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녹색당과 같은 사회운동단체나 정당이 그 사회에 뿌리깊이 내리고 있다.

한국인 중에는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물질주의자의 비중이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감소세를 보인다. 지난 25년간 물질주의자의 비중을 보면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인 1998년 57%로 최고에 달했다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한편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은 6%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다. 가까운 미래에 서구의 녹색당과 같은 신종 정당이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지닌 집단이 부상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주력이 될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학생과 청년층이다. 이들의 탈물질주의적 태도는 경제적 불황과 취업난으로 인해 10% 내외에서 억제돼 있지만, 앞으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보수적 물질주의자'들은 고도성장기에 대한 강한 향수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만한 수적 비율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의 지향은 지금까지의 진보 대 보수의 갈등 전선을 다원화해 나가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지자 간에는 물질-탈물질주의적 가치관 구분에서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탈물질주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서 10% 수준으로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민노당 지지층 중 상당 부분이 고학력.중산층.화이트칼라에 집중된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경제 문제는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핵심 사항이다. '경제안정과 범죄소탕'을 인간적인 사회나 창의성보다 중요한 국가 목표라고 우선적으로 고른 비율은 87%로서 작년에 이어 최고 수준이었다. 환경 개선이나 개인발언권 확대보다 '높은 경제성장과 방위력 증강'을 선택한 비율은 82%였으며, 언론자유나 국민참여보다 '물가, 인플레 억제와 사회질서 유지'를 선택한 비율도 72.8%로서 압도적이었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 가치'와 생활정치가 주는 매력보다는 '부국강병'을 원하는 현실주의자들인 셈이다.

이재열(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 배타적 대외인식

한국인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불신이 크며 경쟁적인 국제 관계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힘, 특히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엔 다른 나라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국제주의적 인식'과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군사주의적 인식', 국가경제와 세계경제의 관계에 대한 인식, 주요 주변국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이 포함됐다.

국제주의와 관련된 질문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응답이 나왔다.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늘려야 한다(40.7%), 외국인의 한국국적 취득을 쉽게 해야 한다(30.0%), 한국의 입장과 다르더라도 국제기구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37.5%) 등의 진술에 긍정적인 응답은 절반을 넘지 못했다.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높고(67%)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강해야 한다(72.7%)는 사람들이 많았다.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응답자도 66.5%에 이르렀다.

1년 전 조사에서 50.7%에 불과했던 (중앙일보 2004년 9월 30일자) 핵무기 보유 주장이 크게 늘어난 것은 올 초 북한의 핵보유 선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무역의존도가 70%가 넘지만 대외경제 관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배타적이다. 68.9%의 응답자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쌀시장 개방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주변국 불신도 컸다. 북한.중국.일본.미국.러시아 등 주변국을 신뢰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매우 신뢰 또는 대체로 신뢰한다는 응답은 대부분 7%를 넘지 않았다. 반면 불신한다는 응답자는 신뢰한다는 응답자의 10배쯤 됐다. 특히 일본에 대한 불신이 컸다. 미국은 예외적으로 신뢰한다는 응답자가 20%나 됐다. 불신한다는 응답자(44%)와의 차도 크지 않았다.

주변 4강이 곧 세계 4강인 지정학적 조건, 오랜 민족의 분단, 세계시장 의존도가 높은 지리경제적 조건으로 국제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게 한국의 숙명이다. 배타적인 대외인식은 이런 의존적 숙명에서 나온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우리 외교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이 도전을 이겨내고 세계 속의 국가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태현(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 위축되는 중산층 의식

설문조사에서는 스스로 최상위 계층에 속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0.1%, 중상위 계층에 속한다는 응답자는 3.3%로 극히 적었다.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응답자는 36.4%였다. 반대로 자신을 중하위 계층에 속한다고 본 응답자는 전체 41.9%에 달했고, 최하층에 속한다고 한 응답자도 16.4%였다.

시기별로 계층의식을 따라가면 심각성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번 설문의 일부 문항은 통시적 분석을 위해 계층의식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들과 같은 내용으로 설계했다. 1984, 90년, 95년 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7→44→40%로 증가하다가 완만하게 감소했다. 95년 중산층의 감소는 하위 계층이 아니라 상위계층의 증가(9→12%)로 이어졌다. 80년대 중반에서 시작돼 외환위기를 맞기 전인 95년까지 이어진 호황기가 반영된 응답이었다.

그랬던 것이 외환위기 직후인 99년 조사에서 중산층 의식을 가진 사람이 33%로 급감했고, 2000년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39%로까지 회복되는가 싶더니 이번 조사에서는 다시 36%로 떨어졌다. 대신 자신을 하층 계층으로 느끼는 응답자가 58%까지 치솟고 있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계층 간의 심리적 거리감이 더욱 부각되게 마련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소득 양극화 현상이 극단적인 계층 간 대결로 번지지 않은 것은 중산층 의식이 상당한 완충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위 계층(최하층+중하층)이라고 평가하는 집단과, 상위 계층(최상층+중상층)이라고 보는 집단들은 현실 평가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자신을 상위 계층 이상으로 보는 응답자의 경우 '1년 전에 비해 가계경제가 나빠졌다'는 인식이 12%에 불과했지만 하위 계층은 41%였다.

하위 계층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며 사회갈등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었다. '대한민국에 대해 부끄럽게 느끼는 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상위층의 32%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하위층은 53%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하위층이라고 생각할수록 노사 문제, 세대 등 계층별 관계를 보다 갈등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 갈등구조에서 중산층은 상층과 하층 사이에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계층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소득 양극화 현상에 대한 근본적 처방과 함께 사회적.경제적 허리를 강화하기 위한 중산층 대책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정한울.정원칠(EAI 선임연구원)

*** 정체성 연구 참여자

◆ EAI 시민정치패널=강원택(위원장.숭실대 정외과 교수).김병국(EAI 원장.고려대 정외과).김민전(경희대 교양학부).김장수(고려대 BK연구전임강사).김태현(중앙대 국제대학원).이내영(고려대 정외과).이재열(서울대 사회학과).이현우(경희사이버대 영미학과).정원칠(EAI 선임연구원).정한울(EAI 선임연구원)

◆ 중앙일보=신창운 여론조사전문기자, 전영기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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