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천 법무 지휘권 발동' 파문] 검찰, 수용하든 거부하든 상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김종빈 검찰총장이 점심식사를 위해 굳은 표정으로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다.김태성 기자

헌정 사상 첫 수사 지휘권 발동 이후 김종빈 검찰총장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김 총장은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수용 또는 거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검찰은 엄청난 후유증과 진통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수용하면=김 총장이 천 장관의 수사 지휘권을 받아들일 경우 파국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일선 검사들의 격앙된 반응을 감안할 때 수용이라는 사실상의 '백기 투항'은 김 총장의 권위에 타격을 주게 된다. 이 경우 총장의 자진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총장이 장관에게 수사 지휘권을 '헌납'하게 되면 나쁜 선례를 남기고 검찰 조직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번 사태는 김 총장 전임자인 송광수 전 총장 때와 대비된다. 송 전 총장은 지난해 3월 촛불시위 주동자 체포영장 청구와 관련,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갈등을 빚을 때 "나를 먼저 조사하라"며 맞섰다. 같은 해 6월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려는 법무부와 여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내 목을 먼저 쳐라"며 맞섰다. 이런 모습이 송 전 총장의 위상 강화로 이어졌다.

천 장관과 김 총장 사이에서 이견을 보였던 각종 현안 처리도 천 장관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동안 김 총장은 비교적 검찰 조직을 잘 보호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월 '대상그룹 부실수사'논란 때 천 장관은 "검찰권 행사의 지휘.감독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구체적 사건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히자, 김 총장은 "지휘가 내려와도 비합리적인 부분까지 승복할 이유는 없다"며 맞받았다. 국정원(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 수사에서도 천 장관은 특별법.특검법 제정으로 내용수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면 김 총장은 이에 반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 총장이 천 장관의 지시를 받아들이면 힘의 균형은 무너지고 '천정배의 검찰'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 일선 검사들의 시각이다.

◆ 거부하면=김 총장이 장관의 지휘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정면충돌 사태로 비화된다. 김 총장은 지휘권자의 명령을 거부한 것에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밝힐 가능성이 크다. 물론 검찰청법에 총장이 장관의 지휘권을 거부할 경우를 가정한 규정은 없다. 이 때문에 검찰 내부에서는 "지휘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검찰 내부의 의견이 모이면 김 총장이 이에 따르되 굳이 사퇴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총장이 사퇴한 뒤 천 장관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을 경우 자칫 천 장관은 물론 현 정권도 검찰의 조직적인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벌써부터 소장파 검사들 사이에서는 천 장관을 겨냥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일부 검사들은 "공안사범 구속 여부라는 단순한 사건으로 검찰 총수의 권위를 이렇게 흔들 바에야 차라리 장관이 총장까지 겸직하라"는 비아냥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법무부 장관을 지낸 원로 법조인은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강정구 교수 사건'처럼 민감한 사안에서 천 장관이 진보 진영의 편을 든 지휘권 발동은 경솔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만약 천 장관과 김 총장의 동반 사퇴 상황이 벌어지면 검찰 조직은 수뇌부 인사 등 후폭풍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 또 장관의 지휘권을 인정한 검찰청법 규정(8조)에 대한 개폐 논의가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공론화될 것으로 보인다.

장혜수 기자<hschang@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