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파일] 평양서 '력도산의 비밀' 촬영한 중국동포 감독 박준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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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북한의 영화배우와 스태프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혹 엑스트라 섭외가 어렵진 않을까. 아니면 대규모 군중 매스게임처럼 척척 움직이는 엑스트라가 널렸을까. 머지않아 남.북한이 함께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의문들이 제기될 것이다. 실제 몇몇 국내 영화인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영화를 찍는 일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10일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해운대의 한 호텔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영화 관계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부산영상위원회가 주최한 '비프콤 2005'행사에 중국동포 박준희(사진) 감독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촬영을 마친 그의 영화 '력도산의 비밀'은 1년 동안 평양에서 찍은 작품이다. 장소만 빌린 게 아니라 북한의 감독과 배우, 스태프, 엑스트라까지 참여한 실질적인 공동제작이었다. 북한의 영화 환경을 타진하기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박준희 감독은 "문화혁명 이후 한동안 중국의 영화 산업은 거의 붕괴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중국과 북한의 첫 합작 영화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감독도 양국에서 한 명씩, 주연 배우와 스태프도 절반씩 참가했다. 대신 장소와 엑스트라 섭외는 전적으로 북한에서 이뤄졌다.

'력도산의 비밀'에 출연한 북한 배우들도 그냥 '인민배우'나 '공훈배우'가 아니었다. '꽃 파는 처녀'에서 꽃분이 역을 맡은 홍영희와 '이름없는 영웅'에서 주연을 맡았던 김정화 등이 출연했다. 둘 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 옌볜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배우들이다. 박 감독이 놀란 것은 그들의 자세였다고 한다. "혹독하게 추운 지난 겨울이었죠. 김정화씨가 얇은 기모노만 입고 야외 촬영을 했어요. 얼굴 조명을 맞추기 위해 누구 한 사람 밖에 서 있어야 했죠. 보통 스태프나 엑스트라를 대신 세웁니다. 그런데 직접 나가서 서 있더군요. 그것도 한 시간 동안 벌벌 떨면서 불평 한마디 없이 말이죠." 그래서 그는 이유를 물었다. "사람마다 얼굴색이 다르잖아요. 제 얼굴을 찍을 텐데 다른 사람을 세우면 완벽한 조명이 나올 수 없어요." 남한은 물론 중국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톱스타의 자세였다.

또 북한의 주연뿐 아니라 조연급 배우들의 순발력에도 놀랐다고 했다. "처음엔 중국 측의 연출 방식을 아주 낯설어 하더군요. 그런데 순식간에 따라오는 거예요. 놀라운 순발력이었죠." 중국 스태프도 한결같이 "북한 배우들의 수준이 중국 배우보다 한 수 위"라고 입을 모았다. 5000~6000명의 엑스트라를 모았을 때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했다.

1970년대만 해도 북한은 '영화 대국'이었다. 40대 이상의 중국동포들은 어릴 적에 대부분 북한 영화를 보면서 자랐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북한의 영화 기자재는 열악하다. 경제난 때문에 기술적 측면도 상당히 낙후돼 있다. 박 감독은 "북한도 그걸 잘 안다"고 말했다. 동시에 중국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북한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다. 박 감독은 "북한 영화판을 제대로 알수록 영화의 남.북 합작도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백성호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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