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e] 부산 시네마 키드의 하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아시아 최고'의 반열에 오른 원동력으로 젊고 열정적인 영화팬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낮에는 극장을 가득 메우고, 영화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며, 새벽에는 매표소 앞 노숙을 불사하며 오늘의 영광을 일궈냈다. 부산을 찾는 해외 영화인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열광적인 관객을 보지 못했다"며 감탄한다. 특히 10회를 맞은 올해는 관객 수가 역대 최고인 20만 명에 육박할 전망이다. 직장인과 가족 관객의 가세로 영화제가 정점을 이룬 8일 토요일. 인터넷 카페 '러브 PIFF' 회원들을 중심으로 '2005년 부산 시네마키드'의 하루를 밀착 동행취재했다.

부산=주정완 기자, 사진=박민혁.박장명 대학생 사진기자

*6시
부산 금련산 청소년수련원

항구도시 부산의 아침 바람이 꽤 쌀쌀하다. 전날 서울에서 KTX를 타고온 박종휘(26.영화감독 지망생)씨는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이곳은 하루 숙박비가 3000원 정도인 데다 각지에서 모인 영화광들과 만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화장실은 층마다 하나, 난방이 안 되는 써늘한 방에 10명 정도가 같이 자지만 불만은 없다. 지하 샤워실에서 따끈한 물에 세수를 하니 정신이 번쩍 난다. 상영시작(오전 11시 전후)까지 한참 남았지만 박씨는 짐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미처 예약을 못한 영화표를 구하기 위해서다. 승객이 드문드문한 지하철에서 오늘의 스케줄을 점검한다. "자, 시작이다."

*7시30분
매표소 앞

해운대 메가박스 1층. 아직 문을 열지도 않은 매표소 앞에 이미 100명 정도가 희한한 줄을 이루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에 종이박스와 신문지를 깔고 두꺼운 겨울파카를 걸친 채 선잠을 자는 사람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노숙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팬들이다.

오전 9시 매표소가 문을 연 지 10분 만에 "413번 매진"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박씨가 보려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다. 그러나 부산영화제 4년째인 그의 표정은 담담하다. "흔히 있는 일인 걸요.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죠."

매표소 옆에서는 최선경(23.대학생)씨가 "영화표 사실 분"을 외친다. "친구가 안 와서 표가 남았어요. 당일표는 환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팔아야죠." 남은 서너 장 표에 최씨의 마음이 급하다. "오늘 첫 영화를 남포동에서 봐야 하는데 여기서 1시간이 넘게 걸리거든요." 결국 티켓 교환 담당 자원봉사자에게 남는 표를 맡기고 남포동으로 향한다.

*12시 ~15시
해운대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 정원. 이병헌과 쓰마부키 사토시(妻夫木聰)의 '오픈 토크'가 시작됐다. 본래 관객들에게 '오픈'되는 행사이건만 좁은 잔디밭에 취재진.관객이 몰려 사실상'안오픈'이다. 행사장 밖까지 늘어선 300여 팬들은 스타의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쓰마부키상, 여기요!" "병헌씨, 제발 여기 한번 봐주세요." 일본 한류열풍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병헌은 물론이고, 한국 기성세대에게는 낯선 쓰마부키 역시 젊은 국내 팬들에게는 인기 절정이다. 친구 사이라는 정은화.임동희(21.대학생)씨는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다 쓰마부키의 팬이 됐다"면서 "직접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귀만 겨우 보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오후 3시 해운대 메가박스 6관. 영화 '청소부 시인'이 끝나고 이란에서 날아온 모하마드 아흐마디 감독이 나와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청소부 선발시험에도 좌익이냐 우익이냐 이념성향을 묻는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데, 그에게서 영화적인 영향을 받았는가." 평소 보기 힘든 이란 영화에 관객들의 질문은 진지하기만 하다. 남기원(24.대학생)씨는 "이란에도 좌우 대립이 심각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며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18시30분
남포동 PIFF광장

어둑어둑해져 가는 가운데 1000여 명의 시민.영화팬들이 몰려 극심한 혼잡을 이룬다. 영화'6월의 일기'에 출연한 가수 출신 배우 에릭(문정혁)의 무대인사 때문이다. 광장은 물론이고 주변 카페의 창가.베란다도 발디딜 틈조차 없다. 잠시 뒤 에릭이 나타나자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진다. 영화제 측은 무대인사 때마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경찰은 물론이고 자원봉사자들로 인간띠를 만드는 등 초긴장 상태다. '인산인해'라는 말을 실감하며 근처 카페에서 잠시 휴식. 들고 다니던 가이드북이 어느새 너덜너덜해졌다.

*21시50분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관

밤바다의 바람이 꽤 매서워도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투 브라더스'에 빠져있는 3000여 명의 관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자 삼삼오오 걸어나오는 관객 중에 낮에 만난 남기원씨의 얼굴도 보인다. "오늘요? 네 편 봤고, 내일도 네 편 예약해 뒀어요." 하루 네 편이면 상영시간만 대략 8시간. 이쯤 되면 눈이 침침해지고 배에서는 소리가 난다. 극장을 오가느라 끼니는 극장 입장 직전의 김밥.샌드위치로 때웠다. 그래도 남씨는 아쉬움이 더 크다. "내년에는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영화제에 못 올 것 같아요. 많이 봐둬야죠."

*23시
광안리 횟집

마지막 상영이 얼추 끝나 '러브 PIFF' 회원들이 모처럼 자리를 같이했다. 모임의 맏형 격인 김영수(31.회사원)씨가 피로와 뿌듯함이 뒤섞인 얼굴로 한마디 한다. "1년 만에 부산에서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처럼 PIFF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기에 오늘의 PIFF가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집시다. 파이팅."

이들이 다시 금련산 수련원으로 돌아온 것은 오전 1시. 하지만 이들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 본 영화의 감상을 노트에 꼼꼼히 정리하는 한편 즉석 토론회도 벌인다. 내일 일정과 동선을 확인하고, 혹 남는 표가 있는지 수소문도 한다. 어디서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열혈 시네마키드들도 이제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한국 영화의 미래를 꿈꾸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