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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보다 중요한 노(老)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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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본업인 공부 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나 찾아라. 취미도 좋다. 매주 토요일 최소한 4시간 꾸준히 몰두해보라. 이렇게 10년을 계속하면 전문가가 되고, 20년이면 도가 트이고, 30년이면 일본 최고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른다."

일본과 같은 고령화 사회에선 퇴직 후에도 한참을 더 살아야 하는데 그때 할 일을 젊어서부터 준비해둬야 한다는 말이었다. 당시 50을 갓 넘긴 그 교수는 분재의 달인으로 통했다. 주말마다 4시간을 꾸준히 투자해온 덕분이었을까. 독하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일본인들의 취미생활은 독특한 데가 있다. 그냥 즐기는 수준을 넘어 죽자 사자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본엔 자기만의 취미에 몰두하는 매니어인 '오타쿠'들이 유난히 많다. 한 여론조사는 40대 샐러리맨들에게 "직장을 그만두면 취미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수입은 지금 받는 급여의 절반으로 줄겠지만 취미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응답비율(%)이 두 자릿수에 가깝게 나왔다. 일본 전체로 따지면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숫자라고 한다. 이들의 취미는 독서나 여행 등 여가형보다는 부가가치 생산형이 많다. 분재, 사진촬영, 카메라 수리, 수공예, 요리, 집 수리 등등.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취미로 돈을 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도 노후에.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거의 득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어렵다.

여기서 우리의 40대 샐러리맨들을 돌아보자. 술자리에 가면 노후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서로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 표정엔 대개 불안감이 서려 있다. 당장 씀씀이가 많아 노후에 지금의 생활수준을 지키기 어려워질 것 같기 때문이다. 퇴직 후 중산층에서 탈락한다고 상상해보라. 나이 든 것도 서러운데 생활수준까지 낮춰야 하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래서 다들 고민이 많다.

그러다 보니 노후대책은 흔히 돈 문제, 즉 재테크로 귀결되곤 한다. 주식 시황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집값이 뛸 만한 동네를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이런저런 금융상품 수익률을 비교한다…. 나름대로 노력은 많이들 한다.

그러나 재테크라는 것도 테크할 재산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매달 얼마씩 어떤 금융상품에 저축하라는 말은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용한 정보다. 적자 가계부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겐 마치 "배 고프면 밥 먹으라"는 말과 같다. 40대에 10억 만들기와 같은 투기성 재테크 신화는 평범한 샐러리맨들에겐 오히려 소외감을 줄 뿐이다.

보통사람이 지니고 있는 자산(스톡)으로 노후를 버티겠다는 생각을 하면 견적이 안 나온다. 빠듯한 월급으론 그런 자산을 만들기 어렵다. 결국 노후에 소액이라도 고정적인 수입(플로)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액수가 현역 시절의 반의 반이라도 좋다. 자녀양육 부담에서 벗어났으니 교통비, 점심 값, 그리고 용돈 정도 벌면 족하다.

하지만 이것도 말이 쉽지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녹록해 보이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미리미리.

초고령 사회의 도래를 경고하는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는 이모작 인생을 준비하라고 강조한다. 전반부 인생의 소출에 기대어 후반부 인생을 엉거주춤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완전히 새로운 출발선에서 인생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씨를 뿌려, 어떤 열매를 거두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과 준비에 달린 셈이다. 길게 보면 투기성 재테크를 기웃거리느라 시간 보내는 것보다 이모작 준비를 하는 게 훨씬 건전하다. 이미 시작된 고령화 사회에선 그게 오히려 투자 수익률이 높을 수 있다. 재테크보다 더 중요한 '노(老)테크'의 핵심은 바로 그런 준비작업에 있지 않을까.

남윤호 미디어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