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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칼럼] 반퇴세대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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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경제선임기자

요즘 한국 영화 위세가 대단하다. 조금만 공감을 불러일으키면 입소문을 타고 금세 관객 1000만을 동원한다. 예약은 필수다. 관람객이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바람에 매표소에선 당일 관람할 수 있는 표를 끊기 어렵다. 그래서 엄지족으로 변신해 인터넷ㆍ모바일로 예약을 시도하지만 역시 어렵다. 왜 그럴까. 고령화의 스펙트럼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영화가 끝난 뒤 불이 켜질 때 주변을 돌아보라. 50~60대 초반 관객이 수두룩하다. 영화관은 더 이상 중고생이나 대학생, 젊은 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언제부터라고 끊을 수는 없지만 2000년대 들어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게 치면 15년쯤 됐을 터다. 이들은 그 전에는 30~40대였다. 이들이 바로 ‘반퇴시대’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말 그대로 이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젊다. 중고생 때부터 영화를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영화를 즐기는 감수성이 살아 있다. 50년대 중반에서 90년대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고속성장 열차를 타고 살았기 때문에 나이를 느낄 겨를도 없었던 세대다. 얼굴을 봐도 주름살 많은 과거의 장년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산업화가 시작될 때 태어난 이들은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살았다. 교실이 부족한 탓에 2부제 수업은 물론이고, 고무신과 보자기 책가방을 들고 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던 사람도 많았다. 이들이 나이를 먹고 성장할 때마다 한국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진학할 때마다 교실을 더 지어야 했고, 교사를 더 뽑아야 했고, 책상과 칠판을 더 많이 만들어야 했다. 이에 따라 공장과 회사가 많아지면서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가 성장했다.

반퇴세대는 그 과실을 가장 풍족하게 따먹은 세대이기도 했다. 1987~89년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을 만나 한국 경제가 쑥쑥 덩치를 키울 때부터였다. 이 시기에 회사에 들어간 베이비부머는 성실히 노력하면 원하는 대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사 원서가 여러 장씩 쌓여 있어서 골라갈 수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연공서열의 앞 대열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비정규직이란 개념은 없을 때였고 정규직에 기죽은 ‘미생’도 없었다. 이들이 30년 간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2만5000달러 시대가 열렸다. 그 세월이 길다면 길지만, 지나고 보니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짧은 순간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 퇴직 쓰나미 앞에 서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극장의 함정’에 빠져 코 앞에 닥친 쓰나미의 위기를 모르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퇴직 준비, 노후 준비다. 중앙일보 설문조사 결과 베이비부머 가운데 노후 준비가 안 됐다는 응답이 41.9%에 달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자녀 교육비 대느라’ ‘자녀 출가시키느라’ ‘수입이 적어서’라는 식이었다.

퇴직 쓰나미에 직면하고 있는데 준비가 안 된 이들은 어떻게 될까. 벌어놓은 건 없고 백세시대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노후가 길어지면서 이들에게는 결국 ‘은퇴하지 못하는 반퇴시대’가 기다리고 있다.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빈곤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바로 앞 세대인 65세 이상 인구의 노인빈곤율이 48%에 이른다. 그래서 주목해야 하는 현상이 반퇴시대의 등장이다. 퇴직은 했지만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퇴직했다가도 언제라도 일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반퇴를 뜻으로 풀어보자. 반은 ①반으로 나누다(半) ②돌이키다(返) ③되돌리다ㆍ반대하다(反) ④버리다(拌)처럼 다양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 퇴(退)를 붙이면 의미가 자명해진다. 퇴직했지만 완전히 은퇴한 건 아니고 반쯤 퇴직한 상태를 의미한다. 또 퇴직했다가 다시 취업 상태로 돌이킬 수도 있으며, 가능하다면 아예 퇴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베이비부머가 연 반퇴시대는 이들의 뒷 세대도 줄이어 따라가게 돼 있다. 60년생을 맏형으로 하는 386세대가 앞장을 서게 된다. 이들이 지난 30년 간 늘 그랬던 것처럼 반퇴시대에도 다시 한국 사회의 선두에 선다. 이렇게 시작된 퇴직쓰나미는 2045년까지 계속된다.

(다음회에선 이들을 둘러싼 경제 환경을 차례로 짚어봅니다)

김동호 경제선임기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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