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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고이즈미 잘못 배우면 망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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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0.26 재.보선의 공천자 면면을 보라. 거기에 무슨 감흥이 있는가. 선거란 정당이 비전과 메시지를 국민에게 제시할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한 일은 당의 실세들에 줄서거나 따라다니던 자들에게 선심 쓰듯 공천의 떡을 나눠준 것에 불과하다. 이래놓고 국민에게 무슨 면목으로 표를 달라고 할 참인가. 그러다가는 재.보선 같은 작은 선거에서는 이기고 대선이나 총선 같은 큰 선거에서는 패배하는 지난 8년의 역사를 답습하게 된다.

열린우리당의 후보도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냐고? 물론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야당이 여당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앞날이 없다. 여당은 정권을 가지고 있고 원내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을 보유한 기득권 정당이다. 신세 진 사람을 챙겨주기도 해야 하고 모험을 하기에는 가진 게 많아서 그런다고 치자. 야당은 다르다. 힘도 없고 정책수단도 마땅치 않다. 국민에게 기대감과 감동을 주지 못하면 결코 정권을 잡을 수 없다.

아하, 한나라당은 스스로 여당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국회에서는 야당이지만 지역에 가면 시장과 도지사, 군수와 구청장이 한나라당 출신이니 불편할 게 없을 만도 하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게 꿀맛 같은데 무엇이 답답해 개혁을 하고 무엇을 더 바라서 변화를 모색하겠는가. 이른바 웰빙족 체질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고질병은 하루이틀 된 게 아니다. 한나라당이 5공 시절의 인물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도 '민정당 떨거지'란 인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이 때문이다. 사람은 바뀌었는지 몰라도 정당의 문화나 체질은 시원스럽게 바뀌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대선이 있던 2002년 초 박근혜 의원은 당 개혁안을 들고 나왔고, 이를 이회창 대표는 수용하지 못했다. 박 의원은 탈당했고, 이 대표가 개혁안을 받아들인 건 여론에 밀리고 밀려 마지 못해서였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거센 노풍(노무현 지지 바람)이 불자 이 대표는 후보로 선출된 날 국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변화를 다짐했다. 그러나 그해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선에서 이기자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현상 유지만 하면 대선에서 이긴다"는 안이함에 빠졌고, 막판 후보단일화란 카드로 업어치기를 당했다.

2004년 총선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선 패배의 충격에 빠진 당을 구할 책임을 떠맡은 최병렬 대표는 처음엔 당의 개혁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실언과 실정이 이어지면서 안이해졌고, 당 개혁도 물 건너 갔고, 결국 대통령 탄핵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결과는 총선 패배였다. 그러면 그 이후 한나라당은 달라지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여권의 지리멸렬함과 박근혜 대표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여성성, 합리성으로 근근이 버틸 뿐 당의 환골탈태는 꿈같은 얘기다.

상황이 이런데 한나라당은 '고이즈미를 배우자'고 한다. 보수 중의 보수논객이라는 조갑제씨도 "박근혜는 고이즈미의 승리에서 배우라"고 했다. 고이즈미의 총선 승리에서 교훈을 잘못 얻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건 노 대통령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이야말로 고이즈미를 잘못 배우면 망한다.

체질과 문화는 바꾸지 않은 채 정치 쇼나 도박 같은 이벤트와 술수만으로 정권을 잡으려 하는 건 비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고이즈미의 승리는 선거의 전선을 우정 민영화 법안의 찬반으로 단순화한 전술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일본 국민이 고이즈미를 보수 속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인정했기에 가능했다. 매 순간 자신을 내던지는 각오로 결단하고, 국민을 바라보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정권은 오지 않는다. 여당의 잘못에 기대어 반사이익이나 챙기는 데 안주한다면 한나라당은 '마의 40% 벽' 앞에서 또다시 주저앉고 말 것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