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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S 2015] 질병 예방은 담배로?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담배 작물은 식물 항체를 만들기에 이상적인 환경이다. 사진은 형광현미경으로 관찰한 담배 잎 표면.

언젠가 여성들이 우표 크기의 투명한 수용성 필름을 마치 입 안에서 녹여 먹는 필름형 구강청결제처럼 성기 속에 집어넣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 필름에 첨가된 화합물은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지 못하도록 막을 뿐 아니라 정자 속 HIV나 헤르페스 바이러스도 차단할 것이다. 게다가 그 화합물은 실험실 속 담배 작물에서 만들어진다.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곧 임상실험에 들어가는 한 제품에 대한 설명이다. 감염성 질병 치료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신개념 약이기도 하다.

제이 머라테이는 보스턴메디컬센터 생물의학 연구동 지하의 한 어두운 방에서 레이저 현미경 위로 몸을 굽히고 동전 크기의 세포 조직이 담긴 접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연구자들에게 여성 성기 모형을 판매하는 회사가 제공한 자궁경부 세포에서 나온 세포 조각이었다. 머라테이는 먼저 정자 세포를 서로 엉겨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항체로 그 세포 조각을 감쌌다. 그 다음엔 그 세포를 보스턴대 학생이 기증한 정자 속에 넣었다. 실험에 사용된 항체는 켄터키 생물처리연구실의 담배 작물 속에서 자라났다. 식물 속에서 생성된 항체를 개발하는 회사들은 이런 항체를 “식물 항체”라 부른다. 수십 년 간의 기대와 실험 끝에 나온 산물이다.

지난 8월 리차드 콘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크게 감동한 눈치였다. 콘은 존스홉킨스대 소속 분자생물학자이자 1980년대 식물 항체에 흥미를 가졌던 초기 연구자들 중 하나다. 내가 전화를 걸기 며칠 전 담배 작물에서 생성된 항체로 만든 에볼라 치료용 시약 지맵이 미국 의료진 2명에게 긴급 투입됐다. 인간에게 투여된 적 없는 약 이었지만 그 두 사람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지맵을 개발한 중소 제약회사 맵바이오파마의 케빈 웨일리와 래리 지틀린은 회사를 설립하기 전인 1990년대에 콘의 연구실에서 박사 후 과정 연구원으로 일했다.

콘과 마찬가지로 웨일리와 지틀린의 목표 역시 질병 예방 효과를 갖춘 피임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은 맵바이오파마가 그런 연구로 투자를 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식물 항체가 분명 효과가 있으리라고 본다. 자연을 똑같이 따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이들은 쉽게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콘은 말했다.

결국 웨일리와 지틀린은 미 국방부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에서 지지자를 찾아냈다. DARPA는 식물 항체가 에볼라 같은 잠재적인 생물 테러에 대항할 치료제 비축분 제작에 효과적이라 여기고 그 질병과 싸우는 신약 연구에 돈을 투자했다. 그러다가 에볼라가 터지자 지맵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단숨에 저명한 약품으로 떠올랐다. “이번 성공으로 식물 항체를 향해 크게 한 발짝 나아갔다. 이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30년이나 걸렸다.” 콘은 말했다. 식물 항체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렸다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78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식물 항체가 완성되는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이제는 내가 죽기 전에 이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콘은 맵바이오파마, 머라테이 연구실과 함께 피임 프로젝트의 공동 연구원을 맡고 있다. 그는 식물 항체가 거의 모든 물리적 질병 치료와 예방법을 바꿀 잠재력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우리가 이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일이 그저 자연이 보여준 것을 따라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콘은 말했다. “포유류 어미들이 유아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포유류 어미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병원균에 노출되고 그 병원균에 저항하는 수많은 항체를 획득한다. “유아는 어미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며 똑같은 병원균들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모유엔 그런 항체들이 들어 있다. 첫 모유는 기본적으로 항체 반죽이다.” 콘은 말했다.

수동적 면역조치

에볼라에 감염됐던 미국인 아쇼카 먹포는 식물 항체로 만들어진 지맵 덕분에 완치됐다.

오늘날 많은 질병은 백신으로 예방된다. 백신은 “능동적 면역조치”로 작동한다. 면역체계를 강제로 감염병과 싸우게 해서 항체를 만들도록 유도한다. 연구실 안에서 항체를 만든 뒤 그 항체를 주사나 피부 흡수 등의 형태로 환자에게 주입하는 방식은 “수동적 면역조치”라 한다. 새로 들어온 항체가 병원균을 물리치는 동안에도 면역체계는 수동적으로 남아 있다.

항체를 만드는 절차는 비교적 간단하다. 우선 연구자들은 원하는 병원균을 공격 가능한 항체를 찾아낸다. 예를 들어 피임용 식물 항체의 경우 1980년대 일본 연구자들은 정자를 보호하는 막을 공격하는 항체를 불임 여성의 몸 속에서 발견했다. 그 다음 연구자들은 항체 유전자를 식별하고 그 유전자를 합성해 식물 바이러스에 삽입한다. 이 바이러스는 8주에서 10주 된 식물 속에서 퍼지되 너무 빨리 식물을 죽게 만들어선 안 된다. 연구자들은 이 조건에 딱 맞는 후보를 찾아냈다. 오랜 담배 재배의 역사 덕분에 잘 알려진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는 담배 작물을 감염시켜 2주 내에 죽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식물이 성장하고 바이러스가 확산됨에 따라 항체도 급속도로 증식한다. 담배가 어느 정도 자라나면 수확해서 항체를 뽑아낸다. “단일클론항체로 가득한 담배 잎을 손에 넣게 된다. 그 잎을 갈아서 일반적인 의약품 제조 절차를 거쳐 정제한다.” 애리조나주립대의 식물학자 찰스 아른첸은 말했다. 그는 2000년대 초 맵바이오파마의 지틀린과 식물 항체 연구 협약을 맺었다.

맵바이오파마는 식물 항체와 그 수많은 응용 제품을 실험하는 소수 회사 중 하나다. 현재 개발중인 에볼라 치료제와 피임약 외에 특정 암과 염증을 겨냥한 약도 연구한다. 웨일리는 이미 다른 회사에서 30종 정도의 항체 제품이 시중에 나왔고 적어도 100종 이상이 개발되는 중이라고 추산 했다. “항체의 장점 중 하나는 아주 정교한 제어가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웨일리는 말했다. 항체는 단일 바이러스에서 구체적인 세포 하나의 특정 부분을 정확하게 노리도록 제조가 가능하다. 병원균과 함께 이로운 세균까지 모두 제거하는 항생제와 달리 항체는 오직 정해진 목표만 공격한다. 만들기도 쉽다. 더 많은 양을 제조하려면 더 많은 담배 작물을 감염시켜서 키우면 된다.

“생체방어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경우 이 제품을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약 쓰게 된다면 많은 양이 필요하다.” 미 국립보건원 생체방어연구 프로그램의 이사 마이클 커일라는 말했다. 항공 여행으로 감염서 질병이 보다 빠르고 멀리 퍼지며 기후 변화로 전염병이 더 악화되는 오늘날에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정부는 신종 전염병에 신속하게 대응할 채비를 갖춰야 한다. 식물 항체가 빛을 발하는 영역이다.

“많은 사람을 즉시 보호하고자 한다면 식물 항체를 만들어야 한다. 식물 항체의 효력은 즉시 발생한다.” 콘은 말했다. 면역 사업 대부분은 백신 제작에 초점을 맞추지만 백신은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몇 주는 걸린다. 전염병이 대규모로 발병 했을 땐 그만한 여유가 없다. 항체를 쓰면 곧바로 보호 체계가 갖춰진다.

식물항체는 백신에 비해 한 가지 큰 단점이 있다. 일단 체내에 주입된 항체는 비교적 빠르게 사라진다. 체내에 남아 있는 기간은 수 시간에서 길어야 며칠 정도다. 신체는 그 항체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백신은 신체에 항체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적은 양으로도 한 사람을 수 년 간 보호한다. 이와 달리 식물 항체를 질병 예방에 사용하는 환자는 약을 무한정 복용해야 한다.

그러나 설령 환자가 백신으로 항체를 만든다고 해도 병원균이 변이하면 무용지물이다. HIV 같은 특정 병원균은 믿을 만한 백신 개발을 무척 어렵게 만든다. “백신을 만들 수 있다면 식물 항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콘은 말했다. “그러나 썩 뛰어나지 않은 HIV 백신을 개발하는 데 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HIV 바이러스의 작동원리 때문이다. HIV 바이러스는 체내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한다. 그런 바이러스를 예방할 백신은 과연 제조가 가능할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는 단일클론항체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약물 내성도 걱정거리다. 항생제 남용이 일반화되면서 악성 세균은 항생제에 내성을 갖도록 진화하고 있다. 특정 항생제 내성 세균종을 제거 하도록 조작된 식물 항체는 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항생제 내성 문제와 항생제만으론 충분하지 않을 경우를 고려해서 감염성 질병에 단일클론 항체를 다양하게 응용해보고 있다.” 커일라는 말했다.

웨일리의 연구실은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더 많은 지맵 에볼라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웨일리는 일이 계획대로 될 경우 다음 지맵 생산분은 1월 중으로 실험 단계에 들어가리라고 말했다. 지맵은 식물 항체 피임약 같은 향후 제품이 “얼마나 큰 규모로,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제작될지” 알려주는 사례가 된다고 웨일리는 말했다. 목표는 피임약 가격을 콘돔 정도로 저렴하게 낮추는 것이다. “우리 계산으로 담배 밭 20만에서 24만㎡ 정도면 전세계 여성들이 이용하기에 충분한 피임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콘은 말했다.

반짝반짝 녹색 별

화창한 10월의 어느 날 보스턴대 학생들이 바깥에서 흥청거리는 동안 머라테이는 지하실에서 검은 재킷 한 벌로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정자 세포들이 자궁내막 세포에 침투했는지 세어 보기 위해서였다.

HIV의 매개체로 알려진 정자 속 백혈구는 녹색 형광으로 물들여졌다. 머라테이는 현미경을 통해 식물 항체로 치료된 세포를 들여다보게 해줬다. 내 시야는 검은 배경을 수놓은 작은 초록빛 점으로 가득했다. 마치 어두운 플라네타륨을 가득 채운 별들 같았다. 세포 조직 표면은 초록색 별들 투성이였다.

머라테이는 내 옆 화면으로 별처럼 빛나는 세포 화상 여러 장으로 구성된 3차원 화상을 살폈다. “아주 좋은데요!” 그녀는 말했다. “훨씬 많은 화상이 필요하지만, 지금도 아주 좋아요.” 치료 되지 않은 표본에선 녹색 세포가 총 77개 발견 됐다. 죽은 세포층을 뚫고 내려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자에 대항하는 식물 항체로 보호한 표본에선 모든 세포가 그대로 표면에 남았다. HIV 바이러스를 포함할지도 모르는 단 하나의 백혈구도 실험용 “처녀”에 침투하지 못했다.

머라테이의 실험은 이 기술의 미래를 잘 보여 준다. NIH는 이 기술을 혁신적인 다목적예방기술(MPT)의 전조로 여긴다. 피임을 통해 성관계로 전염되는 질병까지 예방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현재 시중에서 MPT 역할을 하는 제품은 콘돔뿐이지만 머지 않아 바뀔 것이다. MPT 개발자금을 유치하는 연구 조직 CAMI헬스의 베서니 영 홀트 전무는 HIV 예방에 대한 인식은 썩 좋지 않지만 피임은 그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상대 남성이 콘돔을 거부할 경우에도 여성들은 이제 MPT를 활용해 피임 효과도 누리고 질병 예방도 할 수 있게 된다.

머라테이는 식물 항체 피임에 부작용이 없거나 있더라도 거의 없으리라고 예상했다. 체중이나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경구피임약과 다른 부분이다. 아직 연구자들은 이 수용성 필름의 효과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 확인 중이지만, 대체로 6시간에서 하루 정도가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 잘만 진행되면 여성들은 HIV부터 헤르페스, 임신 조절까지 폭넓은 혜택을 입을 것이다.

머라테이는 연구 성과를 과장할까봐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중간중간 낙관을 내비쳤다. “프로젝트는 어떤 단계에서든 취소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성공한다면 더없이 좋은 제품이 나올 것이다.

글=조 쉴랑거 뉴스위크 기자, 번역=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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