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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때 명나라 참전용사등 후계 뿌리내린 『명의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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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임신왜란에 참전했다가 눌러 앉았거나 명말 청초의 혼란기에 조선에 망명해 한국인이 된 중국계 귀화성씨의 후예들이 서로간의 친목과 조상공경을위한 모임을 조직, 화제가 되고있다.
4백년의 뿌리를 더듬어 한데 모인 별난 단체의 이름은 「명의회」. 명나라의 의를 밝힌다는 뜻이다. 81년5월30일 발족, 오는 30일로 두돌을 맞는 이 단체에는 현재 영양천씨, 추계추씨, 소주가씨, 석강편씨, 광천동씨등 모두 24개성씨가 가입돼 있다. 인구수는 16만6천여명.
『우리는 이제 엄연한 한국인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잊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더우기 4백년전 당시를 생각하면 우리조상들은 우방조선의 국난을 돕기 위해 어깨를 맞대고 싸운 전우거나 만주족에 망한 조국을 등지고 망명한 명나라 유민들입니다. 그 조상의 의를 생각하고 모여듭니다』
회장 편홍기씨 (61·서울 삼성동 163의18)는 이모임의 발족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편씨는 그러나 이 모임의 보다 큰 뜻은 한국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중국과 사이에 가교가 되어 장차 민간외교의 한몫을 거드는 것이라고 했다.
『자유중국 낭만을 가도, 중공본토엘 가도 우리 종씨가 있지 않겠습니까. 핏줄을 숭상하는 동양의 관념으로 볼때 중국과 피로 연결되는 우리 같은 한국인들이 앞으로 할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씨는 장차 중국본토와 왕래가 틔면 제일먼저 조상의 모국을 방문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명의회패들이라고 기염을 토한다.
이들의 조상들은 대부분이 임난참전 용사. 기록에 따르면 임신∼정유 7년 왜난에 참전한 명군은 연20만1천5백명이나 된다.
이름이 알려진 장수만도 2백70여명. 그 중 상당수가 한국에 뿌리를 내려 한국인의 조상이 된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여송은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봉화금씨 여자를 취해 천충이란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그 후손이 현재 거제에 3백여 가구가 살고 있다. 임란 50여년 후인 1644년 명이 망하자 이여송의 손자 응조와 역시 임란에 참전했던 이여송의 동생 여순의 손자성룡이 조선에 건너와 세 갈래 후손들이 함께 농서이씨로 일컫고 있다.
수는 많지 않아 전국에 약6백여가구 그러나 실은 이여송의 뿌리는 한국인이다.
원래 성주이씨였는데 5대조가 조선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달아나 중국인이 된 것.
8대만에 고국으로 재귀화를 한 셈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싸운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후손이 전남해남에서 광동진씨로, 유정(도독)의 후손이 경남거창에 절정류씨로 살고있다.
절강은 귀화성씨중 가장 많이 쓰이는 본관. 편씨(편갈송), 시씨(시문용), 팽씨(팽우덕), 장씨(장해빈), 서씨(서학), 시씨(시등과)등이 모두 석강을 본관으로 쓴다.
광주동씨(동원), 낭야정씨(정선갑), 두능두씨(두사충), 소주가씨(가유유), 상곡마씨(마정)등대부분 중국서의 연고지를 그대로 본관으로 써서 중원의 명문임을 내세우고 있으나 석씨(석중), 화씨(화섭), 초씨(초해창)만은 각각 해주·진양·성주등 한국서의 첫 정착지로 본판을 바꿔 더 완전한 한국인이 됐다.
귀화성씨의 후대중 일부는 한국의 같은 성씨에 묻혀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중국지명의 본관과 독자의 족보를 통해 옛 뿌리를 기억해 왔다. 지금도 귀화조상을 잊지 않고 사당을 세우거나 묘소를 가꾸어 해마다 전국의 일가가 제사도 지낸다.
임란 귀화성씨 가운데 가장 번창하기는 영양 천씨다. 운량사로 참전, 7년 전쟁를 치르고 두 아들과 함께 귀화한 천만리의 후예는 전국에 약1만5천여 가구 8만여명.
유일하게 장관(천명보전보사부장관)까지 냈다. 그 밖의 귀화성씨들은 추씨가 7천여가구, 편씨가 3천여가구, 가씨가 2천여가구, 연씨가 1천여가구이며 나머지는 1백∼7백 가구의 희성들.
『명나라가 망할때 한족의 엘리트 가운데 혈기 있는 자는 대부분 조선으로 건너온 셈이지요.
중원의 한족가운데도 명문의 후예라는 긍지를 모든 성씨가 갖고 있읍니다.』
명의회이사 석대윤씨(57)의 말.
이들 「명조유민」들은 조선조에서 두터운 은전을 받았지만 한때는 모두 잡아 강제 송환하라는 청의 압력으로 성명을 바꾸고 깊은 산간에 숨는 시련의 세월도 겪었다. 대를 내려오며 대부분 한국인과 결혼, 이제는 갈데 없는 한국인.
『명의회는 각 성씨 조상들의 귀화사적을 모아 연합족보를 꾸미고 합동사당을 짓는 사업을 현재 추진하고 있습니다. 족보가 되면 자유중국에도 연락, 종친을 찾아 교류를 할 생각입니다. 장차는 중국본토와도 교류가 되어야겠지요.』
회장 편씨는 한·중친선은 과거의 역사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과제라고 강조한다. 전국에 흩어진 사적의 발굴과 함께 문헌에는 있으나 아직 찾지 못한 남씨, 방씨등 회원 후보성씨들을 마저 찾는 작업도 하겠단다. <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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