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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대변인에게 보내는 박희태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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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이건 아니올시다.”

 5개월 동안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이제 밖으로 꺼내도 될까.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존재이기에 입을 열기가 더 조심스러운 ‘대변인들’ 이야기다.

 기자는 지난해 8월 국회로 돌아왔다. 7년 만이었다. 그동안 청와대 출입기자와 주일 특파원으로 국회를 비웠다. 다시 만난 국회는 생소했다. 의원들의 절반 이상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기자들의 수는 잔뜩 불어났다. 국회 지하층의 기자실이 경쟁을 강요하는 정글처럼 두려웠다.

 그중에서도 7년간의 공백을 가장 확실히 실감케 한 것은 ‘6인 대변인 체제’였다. 새누리당도 여섯 명, 새정치민주연합도 여섯 명. 대변인이 여섯 명이라니, 이건 쇼크였다. ‘수석’ 대변인에, ‘수석이 아닌 그냥’ 대변인에, ‘원내’ 대변인도 별도였다. 매일같이 당직 대변인이 달라지니 승용차 홀짝제나 요일제와도 비슷했다. ‘오늘은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하루하루였다.

 “맹형규 선배, 영수회담 하는 겁니까. 이회창 총재 반응이 뭡니까.” “정동영 선배, 분장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도대체 브리핑은 언제 할 겁니까.” 무엇을 물어봐도 모두 대답해 줄 것 같던 대변인 한 사람만 좇던 1990년대 초년병 기자 시절의 기억은 온데간데없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던 남녀 더블 대변인 체제도 이젠 구식이 됐고, 지금은 ‘6인 체제’가 대세다.

 “당의 입이 여섯 개라니 난 누가 대변인인지도 모르겠어. 옛날에는 부대변인이 하던 일을 모두 대변인들이 하고 있구먼.”

 『대변인』이라는 책까지 펴낸 ‘전설적 고수’ 박희태 전 국회의장도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과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국정의 총체적 난국” “정치 9단” “야당의 습관성 가출” 등 수많은 히트작을 쏟아냈다. 상대 골문을 향해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꽂아 넣는 스트라이커 자리에 무려 여섯 명을 교체 기용하는 변칙 작전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시대는 달라졌다. 2001년 400명이던 국회 출입기자 수는 올해 1400명이 됐다. 대변인의 격무를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늘어난 논평의 양만큼 질도 그만큼 나아졌는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시간조차 ‘간결한 논평’을 고민했다는 선배들처럼 대변인들이 스스로 ‘입의 무게’를 느끼는가다. ‘때론 고등학교 교사처럼 엄숙하게, 때론 신사처럼 매너 있게, 청년처럼 열정적으로, 조목조목 간결하게, 흐느끼는 듯 호소력 있게, TV 앵커처럼 조리있게’ 우리의 대변인들은 매일매일 수많은 논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지난 연말 주요 신문의 ‘올해의 말말말’ 기획에 대변인들의 작품은 없었다. “말을 짧게 하되 여운은 길게” “예상 질문을 염두에 두고 항상 머리를 회전시켜라. 어떤 대답을 할지 항상 공부하라.” 올해도 질 대신 양으로 승부할 게 아니라면 대변인 후배들을 위한 ‘박희태의 팁’을 꼭 메모하셔야겠다.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