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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의 생각의 역습] 숫자를 이기는 비율적 판단

중앙일보

입력

 당신이 만년필을 산다고 가정해 보자. 회사 근처 매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만년필 가격을 확인해 보니 5만원이다. 그런데 매장에 함께 간 친구가 당신이 고른 만년필과 똑같은 것을 4만 5000원에 파는 매장이 근처에 있다고 귀띔해준다. 그 매장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이미 만년필 구매를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지금 방문한 매장에서 만년필을 구매하겠는가? 아니면 다른 매장으로 이동해서 구매하겠는가?

이번에는 위의 시나리오와 동일하지만 구매물품을 고가의 노트북으로 변경해보자. 당신의 맘에 쏙 드는 노트북 가격은 95만원이다. 그런데 이번도 당신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똑 같은 노트북을 94만 5000원에 파는 매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트북 구매를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어느 매장에서 구매하겠는가? 위의 2가지 시나리오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5만 원짜리 만년필을 4만 5000원에 구매하기 위해 15분 이동
B. 95만 원짜리 노트북을 94만 5000원에 구매하기 위해 15분 이동

A와 B 모두 15분만 걸으면 5000원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결과 A상황에서 기꺼이 15분을 걷는 수고를 하겠다는 응답률이 B에 비해 휠씬 많았다. 5만 원짜리 만년필에서 5000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라 제법 높게 느껴지지만, 95만 원짜리 노트북에서 50000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0.5%에 불과해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율이 아닌 숫자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15분 이동 = 5000원 절감’은 A와 B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인지자원이 덜 투입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5000원 절감’이라는 숫자 보다는 ‘10% 절감’과 ‘0.5% 절감’라는 비율로 판단하기 쉬운 것이다.

이처럼 숫자보다 비율에 의존해 판단하려는 본능은 매우 강하다. 이 때문에 우리의 뇌는 확실한 데이터가 없다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조차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예를 들어 태평양에 위치한 섬 두 곳이 태풍의 피해를 받았고 이재민 상황은 다음과 같다고 가정해 보자.

A. 전체 주민 1000명 (주민의 60% 이재민 발생)
B. 전체 주민 1만8000명 (주민의 5% 이재민 발생)

A와 B 중 어느 섬에 더 많은 지원금을 보내야 할까? 실험결과 두 개의 섬에 대한 지원을 함께 결정하는 공동평가에서는 B섬에 대한 지원금이 더 높았다. 하지만 두 개의 섬에 대한 지원을 각각 결정하는 단독평가에서는 A섬에 대한 지원금이 더 높았다.

공동평가에서는 간단한 계산만으로 A섬의 이재민은 총 600명인데 비해 B섬은 900명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B섬에 대한 지원금이 더 높았다. 하지만 단독평가에서는 A, B 각각의 주민 수가 다른 섬에 비해 얼마나 많은지 혹은 적은지 상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우리의 뇌는 A섬의 피해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직관적으로 60%라는 비율에 주목하는 반면, B섬의 태풍피해 심각성은 5%라는 비율로 쉽게 대체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특정 숫자에 대한 판단근거가 불분명하거나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경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굳이 인지자원을 추가로 투입하면서까지 미지의 숫자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즉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뇌는 인지자원이 덜 드는 비율적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꼼꼼히 따지지 않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비율이 숫자를 이긴다.

최승호 도모브로더 이사 james@brodeu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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