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84>제79화 육사졸업생들(137)「5·12계획」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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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16직후에 나온 5·16관계 출판물의 내용에 대해 5기쪽에서는 불신이 대단하다.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요부분이 과소평가 되거나 생략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농사를 지은 사람과 수학한 사람이 끝까지 같은 배를 탄것이 아니고 지은 사람 다수가 도중 하선하여 그들의 역할이 외면당했다고 5기생쪽에서는 말하고 있다.
5·16이 무력혁명인데 무력부대를 이끌고 나온것이 바로 5기들이며 8기생들은 주로 거사계획의 수립과 연락업무등을 맡았다는 것이다.
실제 5·16 당일에 출동한 부대중 해병대를 제외하고 보면 5기생들 부대가 대부분이다.
당시 혁명군 거점이던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 김재춘 대령과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 6군단포병단장 문재준대령, 5사단장 채명신 준장등이 모두 5기생으로 이들은 직접 부대를 끌고 서울로 진주, 주요거점을 장악·통제하여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나 5기생들은 장도영중장의 측근들이 많았다. 그래서 장도영중장의 반혁명사건에 박치옥대령, 문재준대령, 송찬호준장, 김제민중령등이 구속되어 대열에서 탈락됐다.
8기생은 그룹으로 혁명을 꾸미고 참여했지만 5기생들은 박정희 소장의 개별 점조직에 의해 각각 포섭·동원됐다.
그런 점에서 혁명이 성공한후 결속력이 8기보다 약했고 그래서 8기생에게 밀려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5기들은 『우린 혁명수행에는 앞장서 참여했으나 그 성과의 분배엔 결참했다』고들 한다.
여하튼 혁명주체들이 4월7일 회합에서 거사일을 4·19로 잡았는데 그것은 당시 민주당정부가 4·19날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데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 상황이 다급해질때는 군을 투입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한 것이다.
당시 투입될 군의 지휘본부는 6·관구사령부였고 김재춘대령(5기)이 이미「혁명동지」가 되어있었으므로 데모진압에 투입되는 군대를 가지고 그대로 정부를 접수한다는 발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4·l9엔 의외로 데모가 발생치 않고 평온하게 넘어가는 바람에 첫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사홀 뒤인 4월22일 거사계획을 다시 손질했다. D데이는 5월12일. 이 계획에서는 혁명부대가 심야에 비밀히 출동해야 하는 관계로 동원부대의 재편성, 서울주변의 지형정찰, 주요기관점거병력 편성등의 계획을 새로 짰다는 것이다.
그래서 8기생을 중심으로하는 핵심체도 부서배치를 새로 했다.
즉 행정반과 각전반으로 나누어▲행정반은 오치성 (연락책) 김동환 최홍순 김용건(준장예편·한국상호신용금고학장) <이상8기> 유승원 이형주 유근주 이지찬등으로▲각전반은 강상욱 (연락책)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박원빈 신윤창 조창대 오학진<이상8기>김제민 이백일등으로했다.
행정반의 업무는 민주당정부의 주요정책을 분석 비판하고 긴급시책 입안·각종포고문· 성명서작성등이있다.
그러나 5월12일의 계획도 좌절되고 만다. 한국군사혁명사에는「5·12계획」의 실패가 이종태대령의 비밀누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혁명동조자로 포섭된 이대령이 경인통근버스안에서 육본에 근무하는 모중령을 포섭키 위해 혁명거사 내막을 실토하였는데 그 중령이 서울지구 방첩대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수사기관은 이대령을 심문했으나 함구한 관계로 혁명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기관도 그즈음 족청계장교쿠테타설등 여러 갈래의 소문 때문에 그저그런 소문중의 하나로만 여기고 더이상 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태 사건은 4윌21일에 발생해 5월초에 일단락 지어졌던 관계로 「5·12계획」 연기이유가 안된다는 설도 있다.
그보다는 5사단장 채명신 준장, 5군단장 박임항중장등 1군내의 장성들과 박정희 소장사이의, 합의가 미진하고 장도영 참모총장의 속셈을 알지 못해 연기됐다는 얘기도 있다.
장총장이 거사계획을 사전에 알고있으면서 묵인해 준 것이냐, 처음부터 몰랐느냐는데는 아직도 이론이 분분하다.
혁명주체들이나 당시 민주당 각료들은 장총장이 사전에 거사통보를 받고 묵인해 주었다고 주장하고있다.
장도영씨 자신은 거사계획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적극적인 사태진압조치와 박소장이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정보에 따라 조사를 지시한 점등을 이유로 들고있다.
그러나 장도영 중장이 참모총장이 되기전에 막역한 후배인 박정희 소장과 거사를 같이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가 막상 참모총장이 되고서는 차마 자기를 발탁해준 장면 정부를 타도할수가 없어 갈피를 못잡고 있는 사이에 5·16이 터지고 혁명군이 전군·전국을 장악하여 사후에 동조했다는 일부 주체들의 풀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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