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터 만들기 회사가 귀 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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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한국EMC의 직원 희망 들어주기 전담 팀원 10명 중 5명이 모였다. 사진 뒤편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한국EMC사무실이 있다. 왼쪽부터 송용순 부장, 김민경 대리, 전상조 차장, 송건영 차장, 백영훈 차장. 박종근 기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건의하세요. 좋은 일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보기술(IT) 업체인 한국EMC가 올 하반기 임직원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던지는 말이다. 말로만 '좋은 직장 만들기'에 나선 것이 아니다. '사운딩 보드'라는 좋은 직장 만들기 전담팀까지 만들었다. 이 팀에는 상무에서 평사원까지 10명이 소속돼 있으며, 직원들의 소망을 파악하고 제도를 바꿔나가는 것이 주요 임무다. 미국 본사는 '고객과 인재들에게 선택받는 회사(Company of Choice)가 된다'는 방향을 정하고 각 나라 지사별로 알아서 방법을 찾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좋은 직장 만들기 전담팀을 만들었다. 이 팀은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타당성 등을 검토한 뒤 임원진에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 실행에 옮기고 있다. 사운딩 보드를 총괄하는 김순응 상무는 "일하고 싶은 회사, 머물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게 팀의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정장만 고집하던 원칙을 없앴다. EMC는 본사가 격식을 중시하는 미국 동부 기업이어서 전 세계적으로 정장을 입고 일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복장이 유연하고 창조적인 발상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직원들의 의견에 한국EMC는 전통을 깼다. 임원들 사이에 "그래도 회사의 전통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많았지만, 사업 영역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분야로 넓어지며 회사의 분위기도 '소프트'하게 바꿀 필요가 생겨 정장을 벗어던지게 됐다고 한다.

분기마다 한 번씩 사장이 전직원을 모아 놓고 하는 경영 현황 설명회에서는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직원들에게 음료수를 날라다 주게 했다. 그런 식으로 임직원 간에 격의를 허물어야 대화가 원활하게 된다는 이유였다.

10월부터는 회사 안에서 하던 각종 교육을 회사 밖에서 하기로 했다. 회사 안에서 교육하면 일이 생길 때 부서에서 찾게 돼 제대로 교육할 수 없다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한다. 복리후생 제도도 손질했다. 전에도 휴가 때 콘도를 지원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가 있었으나 이제는 '복리후생 마일리지 제도'란 것으로 바꿨다. 직원이 한 해 50만원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도록 했다. 도덕성과 회사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휴가 활동은 모두 허용한다. 가족끼리 놀이공원에 갔다 오거나 영화를 본 비용을 신청해도 되고, 한약을 지어먹어도 된다. 회사가 주는 상을 받으면 50만원인 마일리지 한도가 더 올라가게 했다. 이를 '마일리지를 쌓는다'고 표현한다. 사운딩 보드가 머리를 맞대 이 같은 제도를 만들어 냈다.

사운딩 보드는 지금까지 50여 건을 제안했다. 이 중 10여 건은 즉시 시행하고 있으며, 나머지도 하나씩 실행할 계획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팀장들이 부서원과 악수하며 인사를 하는 것 등도 검토하고 있다. 사운딩 보드의 일원인 조경기 부장은 "희망이 이뤄지는 것을 보며 직원들이 거리낌없이 의견을 내놓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며 "이렇게 대화가 늘어난 것도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EMC는 대형 컴퓨터의 저장 장치 전문 회사로 전세계 50여 개국에서 2만3000여 직원이 일하고 있다. 지난해 총 매출은 82억3000만 달러(9조4000억원)다. 한국EMC는 1995년 설립됐으며 320여 명이 일하고 있다.

권혁주 기자 <woongjoo@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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