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광의 과학 읽기]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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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넓은 의미에서 과학의 역사는 소통의 역사다. 초원에서 사냥감을 찾던 시대부터 인류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해왔다. 포식자와 먹잇감,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이해'는 생존을 건 치열한 행위였고, 또 그 이해에 토대한 인간과 자연의 소통이 곧 과학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의 파워가 비약적으로 커지고, 과학 자체가 권력화하면서 과학의 소통적 성격은 차츰 무대 뒤로 숨겨졌다. 과학은 인간과 세계의 소통과 무관한 '저 너머(out there)'에 있는 '실체'처럼 여겨졌다. 더구나 과학의 소통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즘, 언론은 오히려 과학의 본질인 소통을 왜곡하는 아이러니마저 빚어내곤 한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이충웅 지음, 이제이북스)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의 주체적 과학기사 읽기'를 다룬 책이다. 학부에서 언론학을 하고 대학원에서 과학사회학을 전공한 저자에게 과학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논박의 가능성을 내포한 무엇이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이야기 역시 늘 논쟁적 상황 안에" 있으며 특정 과학의 사회적 의미는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시기에 따라 구성되는 무엇이다.

이러한 구성적 관점은 언론, 특히 신문에 보도된 과학기사를 분석해나가는 과정에서 튼튼한 토대 구실을 한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많은 사람이 신문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전문가의 인터뷰가 들어있기 때문에 무작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숱한 과학기사를 의심해보라고 권한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서의 과학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의심이 과학 자체에 대한 '불신'과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신문 기사는 과학 읽기의 한 방식일 뿐, 유일한 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를 의심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오늘날 과학기사들이 다양한 과학읽기를 방해하고 과학주의.국가주의, 그리고 열광주의라는 왜곡되고 편협한 독해방식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근 많은 논쟁을 야기한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보도도 비판한다. 그는 황우석 신드롬이 과학이 아닌 영웅담이며, 정작 중요한 건 복제 배아나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소의 과학적 내용이 아니라 '승리한 한국인'에 대한 열광이었으며, 그 속에 온갖 열망이 뒤섞여 있다고 꼬집는다.

그가 얘기하는 성찰이 어떤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다양한 과학읽기가 얼마가 중요한가를 일러주는 것 자체로도 신선하다.

(과학저술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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