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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조선 왕가 궁터에 세워진 대한제국 중앙은행의 숙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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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호 20면

1920년대 초 서울의 모습(왼쪽 사진). 가운데 소나무 숲 앞의 큰 건물이 구한국은행이다. 이 건물이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다. 구한국은행의 오른쪽에는 경성철도호텔(우측 윗부분 큰 건물, 현재의 조선호텔), 조선상업은행(현재의 한국은행 소공동 별관)과 경성우체국(현재의 중앙우체국)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의 한국은행 모습. 소나무 숲 위치에 한국은행 본관이 들어서 있다. 한은 화폐박물관 오른쪽 건물은 한은 소공동 별관이다. [사진 한국은행]

1894년 4월 시작된 동학혁명은 그해 10월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은 조선을 돕는다는 이유로 한반도에 군대를 몰고 들어와 충돌했다. 동학혁명과 함께 진행된 그 사건을 청일전쟁이라고 한다.

⑥ 한국은행의 태동

당시 조선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터를 내어 주는 바람에 전국이 쑥대밭이 되고, 국고는 바닥났다.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의 입김에 따라 출범한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재정난 때문에 갑오개혁을 집행할 여력이 없었다. 일본을 좇아 은본위제도를 실시(신식화폐 발행장정)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가 나서서 본국에 차관 제공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망설였다. 중국과 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일본 정부가 조선에 돈까지 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러시아까지 참전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행을 동원했다. 정부예산안을 심의하던 의회는 정부 대신 일본은행이 조선에 대출하도록 명령했다.

그것을 발판으로 1895년 3월 5일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과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장 쓰루하라 사타키치(鶴原定吉) 사이에 300만 엔의 대출계약이 체결되었다(고종실록). 조선 정부의 조세수입이 담보로 제공되고 연6%의 금리 조건으로 실시된 일본은행의 대출은 4년 뒤인 1889년 상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출금의 완납은 1907년까지 늦춰졌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조선이 사실상 독립국이라고 보기 어려워진 때였다.

러시아, 일본 견제를 위해 금융개혁 주도
돌이켜보면 당시 일본은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외교적으론 실패했다.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뺏은 땅을 러시아·독일·프랑스 등의 압력으로 되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삼국간섭). 그 일 이후 러시아는 총 한 번 쏘지 않고도 일본보다 더 큰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친일파들이 퇴조하고 명성황후의 후원을 받는 친러파들이 대거 중용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런 상황에 당황했다. 판을 뒤집기 위해 일본은 이노우에 공사를 소환했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투입했다. 군인 출신의 그는 조선에 부임하자마자 만행을 저질렀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弑害)한 것이다(을미사변).

이런 폭거를 통해 일본이 다시 지배력을 얻는 듯했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1896년 2월 일본군으로 둘러싸인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아관파천). 거기서 고종은 친러파 중심으로 내각을 새로 짰다. 그리고 이전의 친일 내각 관료들의 체포명령을 내렸다. 내각을 이끌던 김홍집은 행인들의 눈에 띄어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다.

한국은행 출입문 옆에 있는 하마비(행인들이 말에서 내릴 것을 알리는 표식).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송현궁의 흔적이다. 인조는 화폐경제 촉진을 위해 상평통보를 처음 발행한 왕인데, 그가 살던 곳에 한국은행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러일전쟁 이후 상황 급반전
1년 뒤에는 러시아 공사관과 인접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1897년). 탁지부 고문으로 임명된 러시아의 알렉세예프는 일본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우선 전환국(典圜局)을 인천에서 서울 용산으로 옮겨 일본인들이 화폐 발행에 간여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정부의 은행’ 역할을 담당할 한아(韓俄)은행을 설립했다(1898년). 나아가 은본위제도를 금본위제도로 바꾸고, 중앙은행(대한중앙은행)도 설립하기로 했다. 일본 제일은행이 수행해 오던 해관세(海關稅) 취급업무와 은행권 발행을 중단시키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고종은 그 계획에 따라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조례’를 선포했다(1903년). 다급해진 주한일본공사는 “은행의 신용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금화도 안 만들면서 무슨 금본위제도냐”는 등의 논리를 내세워 조선의 계획을 만류했다. 일본 제일은행에 대한 조선인들의 감정이 나쁘다면, 미쓰이(三井)물산회사로 교체하겠다는 제안도 했다. 말이 먹히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은 전략을 바꿨다.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위해 ‘대한중앙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진실로 시의적절하며 중요하다”고 고종의 결정을 치켜세우고 일본의 경험을 적극 전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아울러 친러파이자 ‘대한중앙은행’의 부총재로 임명된 이용익(李容翊)에게는 은행 설립에 필요한 300만 엔(1500만 냥)의 자본금을 일본이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일본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중앙은행은 개혁군주 알렉산드르 2세의 사재로 설립된 내각의 부속기구였으며, 국고금 관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중앙은행이라기보다 황제의 개인금고에 가까웠다. 게다가 농업국가 러시아는 금융에 관해 무지했다.

이에 비해 1882년 정부와 민간이 절반씩 출자한 주식회사 형태의 일본은행이 유럽의 중앙은행에 가까웠다. 금융업에 관한 한 일본이 한 수 위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제안으로 ‘대한중앙은행’이 세워지더라도 업무제휴(코레스 계약)나 출자 등의 방법으로 일본이 결국 조선의 화폐와 금융 문제에 간여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계산이었다.

러일전쟁 승리 직후 경복궁 안의 모습. 일본군이 궁안으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고종은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한밤중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인근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중앙은행 설립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두뇌싸움은 러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청일전쟁을 경험한 조선은, 그 전운을 감지하자마자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에 서명토록 했다(1904년). 조선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일본의 군사동맹국이 되고, 이 조약에 반대하는 친러파 이용익은 일본으로 납치되었다. 그 바람에 그가 진행하던 ‘대한중앙은행’ 설립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놀랍게도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의 지지까지 얻어내 거칠 게 없어진 일본은 1905년 고종에게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더니, 1907년에는 그를 퇴위시켰다. 이제 대한제국의 몰락은 시간 문제였다.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일본의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이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해왔다. 1882년 조선의 해관세를 취급한 이래 대한제국에서도 국고금을 관리했다. 청일전쟁 때는 일본의 군용금 지급창구 역할도 했다. 이 은행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은행장은 고종 퇴위 이후의 정부 방침이 궁금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조선통감을 찾아가 조선에 정식으로 중앙은행을 세울 때가 되었다고 운을 띄웠다.

시부사와의 속내는 일본 제일은행이 조선의 중앙은행이 되는 것이었다. 설계사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에게 이미 새 건물의 설계를 맡겼다. 다쓰노는 일본은행 본점을 설계했던 경험을 살려 장차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쓰일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건물을 완성했다.

그 건물이 들어설 곳은 달성위궁(達成慰宮) 터였다. 그곳은 선조의 사위(달성 서씨)이자 인조의 고모부인 ‘달성위’가 살던 집이었으나, 1895년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Scranton·한국명 施蘭敦)이 이를 사들여 교회(달성교회)를 세웠다. 일본 제일은행은 스크랜턴으로부터 1907년 교회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다쓰노의 작품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급했다. 이토 조선통감이 제일은행에 중앙은행의 지위를 부여하는 대신 새로운 중앙은행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 이름은 ‘한국은행’이라고 붙였다(오늘날의 한국은행과 다르기 때문에 구한국은행이라고 부른다). 그 결정에 따라 일본 제일은행은 한창 짓고 있던 건물과 땅을 1909년 구한국은행으로 넘겼다. 한때 이승만·최남선·주시경 등이 야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교회 자리에 1912년 완성된 그 건물이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다.

참고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교회만 지은 것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학당을 세운 것에 자극받아 달성위궁 바로 뒤 송현궁(松峴宮) 자리에 치과병원을 세웠다(부자들에게 치료비를 받아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고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송현궁은 선조의 네 번째 부인이자 달성위의 장모인 인빈 김씨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며, 그녀의 손자인 인조(능양군)가 어린 시절 자란 곳이기도 하다. 스크랜턴의 치과병원 자리는 훗날 경성치과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이어지다 1988년 한국은행 본관이 세워졌다. 이것이 우리나라 중앙은행의 부동산에 관한 기록이다.

일본이 세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올해로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는다. 돌이켜보건대 1895년 조선 정부와 일본은행 사이에 체결된 300만 엔의 금전거래가 한·일 간 최초의 차관계약이었다. 중앙은행이 외국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일본은행은 그렇게 했다. 정부가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은 일본은행의 숙명이다. 정부의 경기회복 프로그램에 동원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은행은 한 번 쏘고 버려지는 ‘아베의 화살’ 정도로 취급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도 일본은행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조직은 건물부터 일본은행의 동생이었다. 그 조직은 과연 이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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