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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총선 이후 독일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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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독일의 슈뢰더 정부는 오랜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 복지정책의 축소 등으로 지지율이 바닥에 이르자 궁여지책으로 조기 총선을 선택했다. 선거가 실시된 배경과 선거 전의 정당 지지율로 보아 총선의 승자는 당연히 기민.기사연합으로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낮은 점수의 무승부(기민.기사연합 35.2%, 사민당 34.3%)였다. 따라서 야당인 기민.기사연합의 사실상 패배로 평가되고 있다.

'여소야소'라는 흔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 독일 9.18 총선은 오늘날 독일이 처해 있는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독일 언론과 외신은 야당이 경기부양이라는 미명하에 지나치게 신자유주의적인 공약을 내세움으로써 자충수를 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이 처해 있는 현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민.기사연합의 패배가 단순히 선거공약이나 전략상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독일 경제는 1990년대 중반까지 통일 특수로 활기를 띠다가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실업률은 사상 최고에 달했으며, 급격한 물가상승을 몰고 온 유로화(貨)는 가뜩이나 침체된 내수를 더욱 위축시켜 일종의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낳았다. 게다가 독일 기업들은 풍부하지만 값비싼 국내 노동력을 외면한 채 저임금으로 유혹하는 이웃 동유럽으로 생산설비를 이전하고 있다. 국제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의식해야 하는 이들에게 사회정의보다 이윤추구가 훨씬 더 중요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오랜 전통을 가진 독일 사민주의마저 흔들어 놓았다. 전통적으로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해온 사민당 정부는 최대한 소극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적응하고자 했다. 막대한 통일비용과 경기침체는 정부의 긴축재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정부 예산 중 규모가 가장 큰 복지예산은 당연히 삭감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책임을 슈뢰더 정부에 물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비난의 표적이었던 사민당이 조기 총선을 제안하자, 공은 유권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민당의 실정을 공격만 하면 됐던 여론은 총선에서 대안을 선택해야 했다. 고통 없는 개혁을 원하는 유권자들에게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건 기민.기사연합 역시 대안이 될 수 없었으며, 이는 예상을 훨씬 밑도는 득표율로 나타났다.

유권자의 선택은 연정마저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의석 분포를 보면,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아닐 경우 세 개의 정당이 연합해야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민당 탈당 그룹이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좌파연합은 연정 참여 가능성이 희박하며, 자민당과 녹색당은 정치노선상 한솥밥을 먹을 사이가 아니다. 여기서 대연정이 유력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이 안고 있는 문제를 고려하면, 선거 결과와 연정에 관한 논의 자체가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구조적 위기'는 단순히 정권 교체를 통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게 해주었던 독일의 기술우위는 정보통신 혁명 이후 옛말이 되었으며, 실업자가 넘쳐나는 동독 지역은 여전히 막대한 비생산적 비용을 집어삼키는 밑 빠진 독이다. 게다가 '과도한' 복지와 정부 규제의 대명사인 이른바 '독일병'은 신자유주의라는 환경에 특히 취약하다. 그렇다고 독일이 '늙은 유럽'을 등에 업고 이러한 환경을 바꾸기는 어려워 보인다.

냉철한 독일인들은 독일이 처한 상황을 잘 알지만 옛날의 풍성했던 파이에 대한 향수를 차마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중적인 민심을 읽어야 하는 정치권은 저마다 목소리를 드높이며 대립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래서 벌써부터 유럽연합과 유럽 각국에서는 독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윤용선 한국외대 외국학 연구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