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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동성애 어젠다와 대한민국 진보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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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최근 나를 잠시 멍하게 만든 뉴스를 접했다. 지난해 12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동성결혼 법적 허용’에 대해 찬성 의견이 가장 많은 지역은 대구·경북(39%)과 부산·울산·경남(38%)이다. 특히 부산·울산·경남은 반대 의견이 49%로, 한국에서 유일하게 반대의견이 과반이 안 되는 지역이다. 반면 광주·전라는 찬성이 34%, 반대가58%였다.

 물론 세상 일 중에는 간단한 게 없다. “경상도 사람들은 ‘보수적’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덜 보수적’이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의 보수·진보 분류법은 세계적으로 매우 독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로서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자신 있게 이렇게 예측할 수 있다.

 몇 년 내로 새누리당은 성적 소수자를 돕기 위한 정책을 제도화하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흠, 이 서양 녀석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군’이라는 독자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갤럽 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시대 변화의 양상이 숨가쁘다. 갤럽의 이번 조사는 한국 국민의 의견 변화를 꽤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2001년 17%의 한국인들만이 동성결혼 법적 허용에 찬성했다. 2013년 25%를 거쳐 최근 35%까지 늘었다. 찬성률이 40~50%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까. 게이·레즈비언 권리는 빠르게 진화하는 사안이다. 언젠가는 한국의 선거 결과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닉슨 대통령의 미·중 수교 결단이 국제정치의 ‘내 편, 네 편’ 구도와 국가이익을 바꾼 것처럼, 과거의 입장을 바꾸는 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새누리당이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진정한 보수 노년층 유권자는 마치 하늘과 땅이 위치를 교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 역학 면에서 보면, 새누리당 말고 그들은 딱히 대안이 없다. 게다가 갤럽 조사가 알려준 것처럼, 새누리 지지층은 같은 의견으로 똘똘 뭉친 게 아닐뿐더러 진보주의자도 꽤 많이 포용하고 있다. 또 새누리당이 성소수자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정당이 된다면, 진짜 진보주의자들도 상당수 흡수할 것이며 좌파 진영은 ‘영혼이 흔들리는’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현재로선 새정치민주연합이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서 나서는 게 의지나 능력상으로 역부족이다. 닉슨식 역발상으로 얻을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권리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재인 의원도 회피하는 사안이다.

 다음 혹은 다다음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동성애자를 지역구 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밀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지난번에 혈통상으로는 한국과 전혀 무관한 귀화인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얼마 전만 해도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미래의 동성애자 국회의원 후보와 마찬가지로, 이자스민이 지역구에서 이기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례대표 명단에 오른 이 의원은 새누리당이 특정 소수 그룹에 신경을 쓴다는 이미지를 고양했다. 나는 이렇게 본다. 지금부터 한 세대가 지나도 외국 출신 대한민국 시민과 그 자녀들은 다른 문제를 떠나 바로 이자스민 때문에 새누리당을 지지할 것이다.

 지난번 대선 때 나는 당시 민주당 당사로 갔다. 성소수자 문제를 비롯해 고전적인 ‘진보’ 어젠다인, 또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동물의 권리와 환경에 대해 민주당 정책은 뭐냐고 물었다. 별말 들은 게 없다. 그들은 대신 ‘이명박근혜’와 BBK 문제를 언급했다.

 ‘쉰 세대’ 진보주의자가 보기엔 신세대는 ‘보수적’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의 20대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야당을 찍지 않는다. 그들이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는 사실 북부 유럽의 젊은이들의 것과 유사하다. 동시에 우리는 명망가 출신의 활동가들이 부상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는 그 어떤 야당 정치인보다 더 젊고 ‘쿨’하기에 새 세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효리다. 주류 셀레브리티 중에서 처음으로 용감하게 나섰다. 앞으로 수많은 이효리가 나올 것이다.

 최근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보다 ‘합리적인’ 진보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합리적인’보다는 ‘연관성 있는(relevant)’ 진보주의가 아쉬운 때가 아닐까.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