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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견제 발판을 마련|비동맹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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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번 비동맹정상회의가 우리측의 희망과는 달리 다소 북한측에 유리한 「한국조항」을 채택, 실망을 안겨주긴 했지만 그 채택과정이 변칙적인 회의운영의 결과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동맹권을 겨냥한 남북한의 외교적 소모전이 이번 회의를 통해 60, 7O년대의 일방적인 북한지지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어느 정도 남북공존시대로 이행되고 있다고 평가될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은 70년 루사카의 제3차비동맹정상힉의때부터 79년 아바나의 제6차회의때까지 주한외군철수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한국조항을 일방적으로 채택하는 책동에 성공해왔다.
북한은 75년 리마의 비동맹외상회의에서 회원국으로 가입한 반면 우리의 가입시도는 좌절됐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1백1개국의 회원국중 단독수교국이 우리보다 11개국이 많은 북한측이 그들의 추가수정안통과에 실패한채 타협안마저 날치기로 채택할만큼 밀렸다. .
그것은 비동맹운동의 주류가 온건노선으로 선회한데도 큰 이유가 있지만 우리의 비동맹내 지위가 어느정도 신장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또 북한의 입김이 일방적으로 작용하던 시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태진전이다.
북한은 회원국으로서 장내외교로 한국조항을 요리할수 있는, 우리보다 매우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반면 우리는 장외에서 정상과 대표들의 숙소마저 접근하기 힘든 아주 어려운 입장에 있었던 점을 비교하면 그결과가 이정도로 끝난것은 불만스럽긴하나 앞날을 기대해봄직한 상황의 전개라 할만하다.
남북한 양측은 이번 회의를 겨냥, 지난 2년간 비동맹권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수행했다.
북한은 우리가 81년과 82년에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및 국제의회연맹(IPU)총회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잇달아 서울에 유치한데 대해 극도의 초조감을 느끼고 제7차 비동맹회의에서 한국조항채택은 물론, 가능하다면 차기 비동맹회의를 평양에 유치해 그들의 열세를 만회해보고자 맹렬히 책동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 회원국들이 평양대회유치에 미온적이고, 특히 지난1월말에 배포된 인도측 정치선언문초안에서 그들의 희망과는 달리 한국조항이 빠지는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북한은 지난4일 친북한회윈국 22개국 (북한포함)을 동원, 한국조항추가수정안을 제출했으나 비동맹내의 분열을 조장하는 캄푸체아대표권문제등의 쟁점에 밀려 9일까지 변변한토의조차 하지 못했다.
친북한의장국인 잠비아대표를 사주, 어느정도 그들의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한국조항을 마무리지었으나 이제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이 과거에 누리던 일종의 반제·반식민의 특혜시대가 지나갔음을 인식하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정부는 이번 비동맹회의가 비동맹권을 겨냥한 남북한의 외교적 소모전에 종지부를 찍어 북한이 더 경쟁할경우 쌍방에 막대한 출혈만 강요할 것이라는 점을 북한측에 인식시켜 남북대화에 응하도록 유도하고자 총력을 다했다.
그 노력은 인도가 1월말에 낸 정치선언초안에서 한국조항을 넣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최종선언문에 한국조항이 부분적으로 되살아나긴 했으나 그 내용은 과거의 한국조항에 비하면 아주 순화된 것으로 점차 비동맹내에서의 남북한위치가 비등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비동맹운동에서 남북한의 경쟁은 북한이 50년대부터 중공을 등에 업고 침투했던 반면 한국은 7O년대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북한은 어느면에선 공산권보다 더 중시할만큼 비동맹외교에 역점을 두어왔기때문에 그동안 한국의 열세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거기에 북한의 맹방인 중공·소련이 북한의 비동맹접근에 도옴이 된 반면 우리맹방인 미국은 우리의 비동맹접근에 장애가 됐던 점도우리의 열세를 가중시킨 요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회의에서 드러난 남북한공존분위기의 유지는 물론, 나아가서 대북한 우위틀 확보하기 위해선 비동맹주의윈칙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해야 하게됐다.
특히 독자적 외교노선의 강조를 통해 비동맹권에대한 우리의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로 대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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