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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와 소프트에 명운 걸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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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필자는 유럽연합(EU) 국가들이 2010년까지의 정보통신기술(IT)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인 'i2010 콘퍼런스'의 주제 발표자로 초청받아 9월 5일 영국을 방문했다. 런던의 숙소에서 인터넷 뉴스 검색을 통해 앨빈 토플러 박사가 국내의 한 포럼에서 미래 경제의 키워드로 제시한 네 가지 흐름에 대해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네 가지 흐름으로 스피드 시대에서 생기는 속도의 격차, 맞춤 생산 시대, 잉여 복잡성 시대, 경계의 붕괴를 들었다.

한국은 지금 토플러 박사가 지적한 경계의 붕괴를 가장 앞서 경험하고 있다. 아마 한국처럼 놀라운 속도로 각종 디지털 기기, 산업과 산업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얼마 전 SK텔레콤이 영화기획사와 음반사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한편 자회사인 TU미디어를 통해 방송도 시작했고, 최근 KT가 영화제작 회사인 싸이더스FNH의 지분 인수계획을 밝힌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적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난 기회가 된다. 우리의 WiBro(휴대 인터넷)나 DMB(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 기술 표준이 글로벌 표준으로 채택됨으로써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명실상부한 선진국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i2010 콘퍼런스'는 EU의 IT 장관과 고위 정책담당자들에게 우리의 앞선 DMB 기술을 깊이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열린 제2차 한.영 이동통신포럼에서도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BBC 등 주요 통신.방송사업자들을 대상으로 DMB 시연을 했는데, 이들도 매우 큰 관심을 표명했다.

지난 4월 노무현 대통령의 독일 방문 당시 정보통신부는 독일 바이에른주 방송위원회와 한국의 DMB 표준 채택을 위한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바이에른주는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의 IT 산업과 디지털 방송 도입에 대해 선도적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이 양해각서에 따라 바이에른주 방송위원회는 월드컵 기간 뮌헨 지역에서 DMB 시범 서비스를 추진한다. 내년 6월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 기간 내내 월드컵 스타들이 연출하는 그 생생한 장면들이 우리 DMB 장비와 휴대전화를 통해 '손안의 TV'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면 전 세계인이 우리 DMB 기술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토플러 박사의 지적대로 스피드 시대의 속도 격차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대(對) 중국 IT산업 전략회의'에서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맞서기 위해 코끼리를 민첩하게 피하는 토끼나 치타와 같은 '스피드 전략'과 '소프트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산업화 시대에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기지만 정보화 시대는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이긴다. 따라서 규모 중심의 중국과 경쟁에서 이기려면 스피드 전략과 소프트 정책이 가능하도록 앞서가는 IT 기술을 모든 산업과 국가 전반에 파급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보통신부가 유럽과 중남미는 물론 세계 각 지역에서 계속 DMB 시연 행사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스피드 전략과 소프트 정책의 일환이다. 이번 대통령의 중미 순방에서도 가는 곳마다 IT 외교에 온 힘을 쏟았다. 남이 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우리 기술의 우수성을 알리고 다녀야 한다. 판촉도 무겁지 않고 부드럽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디지털 기술.제품.서비스의 우수성을 소프트하게 전파하는 '디지털 한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차별화된 정책, 차별화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지금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DMB와 Wi-Bro를 포함한 IT839 전략은 우리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가장 차별화된 스피드 전략이요, 소프트 정책이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