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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자유당과 내각(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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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개헌정국의 열기가 뜨거운 여름을 예고하던 5월 대통령임시관저엔 서류더미가 쌓여갔다. 관저로 오는 진정서나 탄원서 처리를 맏고 있던 장기봉비서는 각 지역에서 오는 의원소환장과 보궐선거요구서·직선제지지질의등 문서에 묻히고 있었다. 바로 그럴때 대결을 더욱 거칠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민당의원이 순천의 한 여관에서 전남지구병사구사령부 소속 군의관 서창선대위를 사살한 사건이다. 사건은 극히 우발적이었고 경치성은 없었다. 당국은 서의원을 살인혐의로 구속했다. 그러자 국회는 서의원식방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검찰은 서의원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서민호, 장교사살>
이대통령은 이 사태에 아주 언잖게 반응했다. 『이 나라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있어. 그런 때에 군인을 쏘아 죽인자를 구속해서는 안된다…그게 어느 나라의 법이야.』이대통령의 그같은 감정 폭발은 서의원이 단순히 내각책임제 개헌의 선봉장이라는 이상의 감정의 응어리 내지는 서의원에 대한 불신이 있었을 지 모른다. 서의원은 한때는 이박사의 신임이 두터웠던 비서였다. 8·15이듬해인 46년 서의원은 전남지사로 있었다.
그해 5월 이박사는 광주에 내려갔다가 서지사를 알게되었다.
서지사가 미국유학도 했다는 것을 알게돼 아주 친근하게 대했고 격려했다. 서지사도 이박사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뒤 서지사는 미군정고문관과 마찰이 생겨 지사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이화장으로 이박사를 찾아갔다. 이박사는 서민호을 비서로 일하게 했다. 그에게 맏겨진 일은 비서로서는 중요업무가 되는 정치담당비서였다.
이박사는 서비서를 신임했고 경부가 수립된 48년 그을 남선전기(현재의 한전)사장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섬진강 발전소의 부실공사가 문제가 되었다. 사건이 워낙 컸기 때문에 사장도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도록 조치했다. 그랬는지 2대 국회에 진출한 서민호는 반이승만의 전위로 변신했다.
이박사로선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음 직하다.
서민호 석방결의로 이박사를 자극한 국회는 잇달아 직선제 개헌안도 정부로 되돌려 보내기로 의견용 모으기 시작했다. 16일 국회의장단파 각파 대표자들은 회의를 일고 정부의 직선제개헌안은 1월에 국회에서 부결되었으므로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재제출 할수 없다는 법해석에 의견을 모았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 이어서 19일까지 각과 의견조정을 보아 그날 본회의에서 반송결의를 해 정부로 돌려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때까지 산발적인 반대운동을 펴던 내각제개헌반대 공통투위는 국회의 반송결의를 막기위한 대규모시위를 단행했다. 19일 상오 10시 부산시내 충무동 광장에는 2천여 시민이 모였다.
반민족 국회의원 성토대회에 동원된 시민들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임시의사당인 경남도청을 향해 시위가 시작됐다. 7백여 경관이 의사당경비에 나섰으며 기마경찰대가 대통령관저를 경비했다. 데모대는 2개의 건의문을 제시했다. 신익희국회의장에게는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국민이 연판장으로 소환 결의한 반민족의원및 애국군인 살해범 서민호석방을 책모한 의원의 제명을 청원한다 ②이같은 요청이 거부되면 우리는 현국회 전체를 반민족국회로 규정, 해산할 것을 요구한다.

<이박사신임 배신>
이 청원서는 제명대상 의원의 명단도 제시했다. 서범석 소선규 임전정 엄상섭 김광준 김의준 전강영 조순 곽상훈 정일형 정헌주 김영선 서이치 이용설등 10여 명이다.
또 하나의 건의서는 장택상총리에게 제출되었다. 국회의장에게 보낸 청원내용의 결의에 덧붙여 만일 정부나 대통령이 국회을 해단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회를 타도하는 혁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했다.
데모는 거칠게 의사당 난입을 시도해 경찰과 충돌했다. 장총리가 수도청강 시절의 면모를 다시 보였다. 그는 데모대의 대표와 면담한 뒤 데모대 앞에서 연설했다. 『헌법과 법률이 보강하는 범위 내에서 여러분의 뜻이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 총리의 설득이었다. 데모대의 다음 요구는 국회의장 면담이었다. 청원서 저수마저 거부한 신의장이 면담을 수락 할리 없었다.
데모는 과격해지고 경찰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하오 3시 장총리는 이병호내무차관에게 군의 협력을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연내무차관은 김일환국방차관에게 헌병 l개소대의 출동을 부탁했다.
대통령의 뜻을 알고 있던 김국방차관은 난색용 표시했지만 장총리의 지시라는 말에 군의 출동을 승인했다.

<헌병출동해 진압>
이렇게 해서 헌병1개소대가 데모현장에 출동했다.
군이 출동하자 데모대열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런데 다음날 내무와 국방차관을 문책해 해임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왔다. 데모대가 3시간이나 국회의사당 주변용 포위한데 대산 문책이 아니라 군의 동원, 그리고 경찰이 데모군중을 난폭하게 다루어 부상자가 생기게 한데 대한 문책이었다. 대통령은 데모행동용 애국충정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런 일이 있었다.
지방에서 국회의원 소관대회가 한고비을 넘긴 5월 중순부터 대통령 임시관저 앞에는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다.
어느 날인가 단식연좌데모가 있었다. 그날 대통령은 홀에 나가 데모광경을 한참동안 지켜봤다. 경호책임자 김장흥총경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수백명의 청년들이 지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젊은이들을 저렇게 고생시킬 수 있나.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아닙니다, 각하. 물 한 모금도 안마시겠다는 단식투쟁이라고 합니다><그래. 국민들의 애국충정이 대단하구먼… 저들의 요구가 뭐라든가><국회를 해산하라는 요구라고 합니다><국회해산이라…알았으니 자네가 나가서 물이라도 마시라고 해. 저러다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그러고는 혀를 차면서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런 대통령이니 데모의 난폭한 진압에 화을 냈을 것은 당연하다. 그때 병석에 있던 장석윤내무는 바로 사표를 썼다. 김일환국방차관의 사표는 장총리가 이대통령에게 들어가 헌병들은 정부청사보호를 위해 총리자신이 지시했고, 헌병과 데모대와는 충돌한 일이 없다는 보고를 듣고 사표를 되돌려 주었다.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무를 전총리 이범석으로 교체했다. 유달리도 사이가 나빴던 장택상과 이범석은 이런 곡절로 이번엔 서열이 뒤바뀌어 내각에 자리를 같이했고 서로 공을 다투며 부산정치파동의 주역을 맡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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