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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자유당과 내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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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가에 속한 적산기업체를 운영하는 자는 정당운동에 헌금을 못하는 것이니 이를 상세히 조사하여 은밀히 보고하라.』
52년2월5일자 「대비지 제2호의1」로 장석윤내무장관과 육군특대장에게 발송된 극비문서다. 즉 일본인소유였다가 정부에 귀속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국회 각정파의 개헌운동에 돈을 대주고 있다고 하니 이 내용을 조사해 올리라는 대통령의 지시문이다.

<야파 자금든든>
52년봄 국회는 정치자금 거래설로 떠들썩했다. 정부가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압도적 다수표로 부결하자 이승만시대는 끝나는 듯했다. 민국당의 내각책임제개헌운동 원내 자유당과가 준비하는 장면의 대통령 추대공작, 거기에다 원외자유당의 원내포섭 활동등 정치 홍수 속에서 각 정파의 유력자들은 정치자금 염출에 나서 있었다. 정작 정부쪽 못지않게 야파의 자금마련도 활발했다.
장면의 대통령 추대공작 자금총책은 오위영의원-신탁은행 3억원 거액융자설등이 오의원의 자금실력을 말해준다.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은 경남의 갑부였던 김봉재·김지태의원등도 야파였다. 내무장관자리에서 막 물러난 조병옥도 민국당의 자금동원에 나서 있었다. 그만큼 야파는 자금에서 실력자들이었다.
이대통령은 장면파등이 막대한 자금을 뿌리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귀속업체에서 흘러나간 돈과 해외에서까지 자금이 보내진다고 듣고있었다. 바로 이런 자금동원설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이같은 지시를 내리게 만들었다.
야파연합의 개헌운동은 4월들어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대통령은 원내외 자유당의 합동으로 내각제 개헌운동을 일단 가라앉히려 했다. 93명선에 이르는 원내자유당중 30명선은 원외로 기운 합동파였다.
그러나 자유당 통합은 이뤄지지않았다. 원내파의 다수의원들은 『의회가 중심이 되는 정당정치 실현에 관한 대통령의 구체적 보장이 없는한 합동을 수탁할수 없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4월8일엔 개헌추진특별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원내자유당의 오위영·엄상섭·정헌주·윤길중·이종형·박정근, 민국당의 임흥순·서범석·소선규·김수학, 민우회의 서이환·이충환·김광준, 무소속의 곽상훈·이용설등으로 원외자유당을 제외한 모든 정파연합이었다.
드디어 4월17일엔 개헌선인 1백23명의 의원이 서명한 개헌안을 발의해 정부로 이송했다.개헌안의 정부이송과 함께 선거일정표도 만들었다. 6월말에서 7월초 사이에 먼저 대통령을 선거하고 곧바로 개헌안 표결을 한다는 이른바 「선선후결」의 일정표였다.
야파는 정권교체를 위한 연합전선을 펴면서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도 만들었다. 이름하여「정치운동에 관한 법안」이다. 4월15일 의결된 법안내용은 ①정치변동기에 있이서는 현행범이 아니면 정치운동자는 체포할 수 없다 ②이를 위반한 군·경·군에 대해서는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③공무원이 정치운동을 위해 협박 금품제공 기타 잇권약속으로 유혹할 때는 3년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폭력행위중 살해는 사형, 상해자는 무기 또는 10년이상, 협박자는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정치활동발 발의>
국회의 활발한 움직임에 대해 대통령은 한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국회에서 이송되어온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접수만 한채 공고를 위한 절차도 밟지않고 방치돼 있었다. 다만 원외자유당이 중심이 되어「개헌반대 전국정당사회단체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을뿐이다.
정부는 4월20일부터 5월초사이에 치러지는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관리에 정신을 쏟고있었다. 원외 자유당등도 이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거는 평온리에 마쳐졌으며 예상했던 그대로 원외자유당등 친정부단제의 압승이었다. 원외자유당은 모든 지역에서 과반수선을 확보했으며 친정부단체의 진출까지 합치면 지방의회의 이승만지지율은 80%선을 넘고 있었다.
그러니까 평온리에 치러진 지방선거는 전시하에서 대통령선거를 치를수 없다는 국회안 정파의 주장을 꺾었으며 이승만의 압승은 직선제라는 대통령의 주장을 형식상으로는 국민의 지지로 완벽하게 뒷받침했다.
대통령이 국회에 대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이같은 지방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 장택상국회부의장을 총리로 기용하면서였다. 대통령은 장면총리의 사표를 편지를 보내서 받아낸 것과 꼭같이 그 후임 총리임명도 편지로 처리했다.

<지방의회를 장악>
비서였던 황규면씨의 회고.
『그때 정부는 아직 서울에 오지않았지만 이대통령은 전선사령관을 부르는등 전쟁수행을 위해 서울의 경무대에 가 있는 때가 많았다. 하루는 내게 <자네가 부산에 내려가 창랑(장택상씨의 아호)에게 편지를 전하게>라면서 봉투를 주었다. 내용은 총리로 임명하려 하는데 인사·재판·외교에는 손대지 말라는 조건을 붙이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강릉, 대구로 해서 부산으로 갔다. 내가 온것을 극비로 해서 경남도청의 국회부의장 비서실에 연락해 창랑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시간이 약속되어 기자들 몰래 부의장실에 숨어 들어가서 만났다. 창랑에게 <중요한 심부름을 왔읍니다. 각하의 편지를 가져왔읍니다>고 하며 편지를 내보였더니 <타의가 없다. 말씀한신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날밤 차로 곧장 올라와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했는데 고재봉비서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한테까지 숨겼다고 서운해 하기도 했다.』
창랑도 바로 뒤따라 서울로 올라와 대통령을 면담하고 곧 국회득표공작에 나서 5월6일 국회인준을 받았다.
그런 포진에 이어 정부는 국회가 의결한 「정치운동에 관한 법안」에 거부권 행사를 했다.
정부는 4월26일 이 법안을 국회에 되돌려 보냈다. 이법안의 공포여부를 논의하던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이것은 법률이 아니라고했다. 정부의 거부이유엔 대통령의 생각이 많이 담겨 있다.
ⓛ이 법률을 외국사람들이 본다면 마치 한국은 비법치국가인 것같은 인상을 준다 ②지금은 전쟁중인데 정치운동을 빙자한 살인이나 중요시설의 방화, 파괴를 목적으로하는 정치단체도 용인하라는 말인가 ③정치운동자는 공무원을 협박하고 매수해도 된다는 말인가 라는 대목들은 그때 국무회의에서 이박사가 특히 강조해 지적한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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