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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영화제 산증인 김지석씨 10년을 돌아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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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때는 KTX도, 멀티플렉스도, 다운로드 받을 인터넷도 없었다. 대신 열혈 영화청년들의 지독한 문화 갈증이 있었다. 그 갈증과 열정이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출범시켰다.

결과는 대박. 첫해부터 무려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전국적으로 영화제.지역문화축제의 붐을 일으켰다. 이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영화의 급성장과 맞물려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잔치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아는 대로다.

개막(10월 6일~14일)을 코 앞에 두고 준비에 정신이 없는 아시아담당 프로그래머 김지석(46.사진)씨를 만났다. 그는 김동호 집행위원장, 이용관 부위원장, 전양준 월드 프로그래머와 함께 부산영화제를 지탱하는 4인방이다.

#영화제? 영화상이 아니고?

"처음엔 영화제가 어떤 건지, 어떻게 참여하는 건지도 잘 몰랐어요. 처음 주머니를 털어 가까운 해외영화제를 간 게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야말로 신천지였죠.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영화, 책에서나 보던 걸작을 직접 볼 수 있는 이런 행사가 우리는 왜 없을까 싶었죠."

그런 의문의 중심에 이용관.전양준.김지석 세 사람이 있었다. 부산 소재 대학에 출강하면서 계간지.소모임 등을 통해 영화에 대한 소회를 나누던 이들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95년. 한 이벤트업체의 대표가 자금을 대겠다는 곳이 나섰으니 영화제란 것을 해보자는 제안을 전했다. 초대 위원장.부위원장은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한 김동호 현 위원장과 박광수 감독이 기꺼이 맡았다.

"그런데 막상 기획안을 제출하자 후원사가 난색을 표했어요. 그쪽에서 기대했던 건 영화제가 아니라 미국의 아카데미상 같은 시상식이었던 거죠."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각계에 두터운 친분을 쌓아온 김 위원장이 뛰어다니며 부산시와 각 기업들의 후원을 새로 확보했다. 첫 단추는 그렇게 끼워졌다.

#아시아에 초점 맞추다

"후발주자로서 차별화 전략은 필수였습니다. 반세기 넘는 역사의 칸.베니스.베를린 3대 영화제는 물론이고 아시아에도 이미 홍콩.도쿄가 있었으니까요."

양쪽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했다. 당시 도쿄는 '아시아의 칸'을 자처하면서 경쟁영화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사실 좋은 경쟁작은 유럽의 3대 영화제를 선호하는 실정. 반면 비경쟁인 홍콩은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을 발굴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부산영화제는 처음부터 비경쟁으로 가되, 아시아 영화에 한해서 경쟁부문(새로운 물결)을 운영하기로 뜻을 모았다. 여기에 더해 3회부터 기획단계의 영화를 투자자와 맺어주는 프로그램(PPP:부산 프로모션 플랜)도 시작했다. 유망한 감독들의 좋은 영화를 입도선매해서 부산을 통해 다시 세계에 소개한다는 취지였다. 관심과 돈이 모이기 시작한 부산은 점차 아시아 영화교류의 중심이 되어갔다. "이제는 관객들도 부산에선 무슨 영화를 봐야하는지 다 알죠.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제일 높습니다."

#쥐에 물린 심사위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화제 첫해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유럽에서 온 심사위원이 극장에서 쥐에 물렸다는 거예요. 제 얼굴이 노래졌죠. 근데 웃으면서 '비밀로 하겠다'고 하더군요. 쥐를 잡기 위해 풀어놓은 고양이가 상영 내내 울어댄 극장도 있었죠."

필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영사 사고도 심심치 않았다. 영화제의 취지가 무색하게 검열.심의문제도 거듭 도마에 올랐다.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시'(1회)는 국내 수입사가 성 묘사 장면 10여 분을 삭제해 논란이 됐고, 동성애를 다룬 왕자웨이(王家衛)감독의 '해피투게더'(2회)는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 걸려 언론.게스트에게만 제한 상영됐다. 국제 망신이라는 여론에 힘입어 사전 심의는 차츰 사라졌지만 또 다른 벽이 남아있었다. 신상옥 감독 회고전의 '탈출기'(6회)와 북한영화(8회)도 7편 중 2편이 제한 상영됐다. "'탈출기'때는 국정원.대검에서 공문이 날아오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데올로기보다도 북한에서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죠."

#부산의 열정, 관객의 열정

"이렇게 열정적인 관객과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를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객이 제일이라는 기조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제의 성장은 새로운 딜레마를 낳았다. 해외 게스트.바이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표 구하기 전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남포동 외에 8회부터 상영장에 추가된 해운대 쪽 멀티플렉스는 스크린 수에 비해 좌석이 적어 더욱 그랬다. 일부 관객은 현장판매 표를 사기 위해 밤샘 줄서기도 기꺼이 감수했다.

해외 게스트에게 부산의 열정을 각인시킨 또 다른 무대는 술자리다. 포장마차는 물론이고, 길바닥에 앉아 술잔을 나누는 진풍경은 외국 사진기자들의 단골메뉴였다. 그 배경에는 김동호 위원장의 남다른 친화력과 주량도 한몫했다. "96년 당시에는 영업시간을 제한했습니다. 밤 12시 이후에는 불이 켜져 있는 포장마차로 옮겼는데, 마침 게스트들이 묵는 숙소로 향하는 길목이었어요. 하나 둘 합류하다 보니 자리가 없어서 신문지까지 펴게 된 거죠. '노천카페사건'이라고들 합니다."

#아시아 문화중심을 꿈꾸다.

"출장요? 한 해 10곳쯤…영화요? 일 년에 800편쯤 봅니다. 출장 가면 낮에 스크린으로 4편, 밤에 호텔방에서 비디오로 4편 해서 하루 8편씩은 보죠."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영화제 준비는 고달프다. 김씨는 겸업이 힘에 부쳐 부산예술대학 교수직은 출범 4년 만에 그만뒀다. 그래도 후회는 전혀 없다고 한다. 출범 이듬해에 태어난 초등학생 아들은 장래희망이 '아시아 프로그래머'라고 할 정도다.

영화광의 꿈을 실현한 지난 10년을 보내며 그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고향 부산을 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 "영화제 출범 이후 생겨난 부산영상위원회는 지역사회가 영화산업을 지원하는 아시아의 모델이 됐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도 부산 이전이 결정됐고요. 부산영화제에서는 PPP에 이어 올해는 아시아 전역에서 선발된 영화 인재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내년에는 필름 마켓의 시작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꿈이라는 그의 말이 그저 꿈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글=이후남,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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