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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에도 한국인…|한국이 좋아 한국에 귀화한 민병갈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국과 관계가 깊은 한국인이라는 다소 묘한 말이 그에게는 썩 잘들어 맞는다.
또 나무 목이라는 글자와도 그는 떼려야 뗄수 없는 오랜 인연이 있다.
만리포해수욕장근처 천리포바닷가에 세계각국의 온갖 희귀한 나무(목)들이 빽빽이 들어찬 18만평규모의 수목원을 가꾸고 있고, 그의 말마따나 「나무 목변이 들어가는」 주식투자에도 오래전부터 손을 대왔으며 지금은 증권회사에서 일을 하고있기 때문에 주식투자에서는 손을 떼려하고 있다.
며칠 전에 새로 얻은 한양기권 고문이라는 직함보다도 천리포 감목원이사장이라는 12년전부터의 오랜 직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민병갈씨(61).
『어느 신문에는 내이름자가 잘못났어요. 내이름은 초두밑에 쓰는 물결갈(몰)이 맞습니다.』 민씨가 61년전 미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광산도시인 피츠턴에서 태어났을 때 그는 Carl Ferris Miller라는 이름 하나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대학을 졸업, 23세때인 45년 미해군장교 일어통역관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뒤 54년부터 한은조사부촉탁으로 지난해 정년퇴직할 때까지 28년간을 「한은맨」으로 일해오면서 그는 민병갈이라는 이름을 또 하나 지어가졌고 79년에는 이땅에 귀화, 한국인이 됐다. 『젊었을 땐 일본말 잘했는데 오래 안쓰다보니 이젠 다 잊어버렸어요.』 민씨의 한국말은 유창하다.
솔담배 한 개비를 권하고 친절히 불까지 당겨주면서 『내가 환갑나이니 불 붙여주면 안되는데…』 한다.
처음 한국에 올때부터 동료들은 다 못먹겠다는 김치도 입에 척척 들어붙고,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가보는 거리가 모두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어 그때부터 귀화를 생각, 완강히 반대하던 고향의 어머님을 끝내 설득시킨 민씨는 그러나 해마다 한두번씩은 꼭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뵙는 「효자」 다.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나는 전생에 틀림없이 한국인이었을 겁니다』 고 지난일을 돌이키는 그의 표정은 무척 진지하다.
한국의 나무라곤 소나무·은행나무밖에 모르던 그는 50년대 후반 한국의 산을 열심히 타면서 「나무」에 관심을 갖기 시작, 71년부터는 아예 천리포에 8천평규모의 수목원을 가꾸기 시작했고 지금은 18만평의 땅에 세계각국에서 어렵사리 구해온 6천여종 수만그루의 나무를 가꾸며 각국의 많은 식물학자들과 교류하는 「나무박사」가 됐다.
『우리 수목원에는 목련만 2백50여종이 있습니다. 4∼5월 목련나무 아래서의 소주 한잔이 아주 좋지요.』 한국적 풍류가 이처럼 자연스레 몸에 배기 이전에 그는 이미 자신이 살고 싶은 땅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사는 유유자적함을 지녔으니 벌써부터 타고난 풍류객인 셈이다.
과연 풍류객이어선지는 몰라도 그는 여지껏 독신이지만 대신 슬하에 양자로 4남을 두었으며 며칠전엔 귀여운 손자의 돌잔치를 맞은 다복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군말이겠지만 민씨와의 인터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몇가지 있다.
한국에서 38년간을 살았고, 한국은행에서 28년간을 일했으며, 62년 증권파동을 겪으면서 손해는 다소봤지만 「파산』만은 면했다는 그의 다채로운 경력과 관계된 질문이 그것이다.
몇마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들은 이렇다.
『한은은 미국 FRB(연방준비이사회)에 버금가는 독립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소나무와 전나무도 잘 구별못하는 「우리나라사람」들의 무관심은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증권투자는 아직 세련되지 못했읍니다.』
역대한은총재중 『신병현총재가 「이런저런 일」로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민씨는 지금도 한은조사부쪽(화보빌딩)에 「내방」을 갖고있다.
민씨는 현재 「서양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유일한 사람이다. <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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