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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 30주기맞아 기념사업협회 발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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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곡 「고향」 등 1백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기고 53년 2월 부산피난지에서 외롭게 생을 마친 작곡가 채동선.
그의 30주기를 맞아 음악계 일각에서 그의 유업을 기리고 숨겨진 작품들을 발굴, 재평가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1901년 전남보성에서 태어나 일본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l924년 베를린 슈테른셴음악학교에서 바이얼린과 작곡을 수업하고 돌아와 30년대를 바이얼러니스트와 작곡가로 활동한 채동선씨는 일제말기에는 뜻을 굽히지 않고 한복을 항상 입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국악채보 등 민족문화유산의 발굴·정리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이 되고 6·25사변이 터져 피난지에서 숨질 때까지 애국적인 정열로 신생조국의 악관질서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고려음악협회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진영 음악인들의 결속과 음악문화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교성곡(칸타타) 「조국」 「한강수」 등을 작곡했고 「삼일절노래」 「개천절노래」 「선열추모가」 등 많은 애국적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들이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였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고 1964년에야 그의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그의 작품집이 출간됐다.
금년에 그의 30주기를 맞아 지난 1월24일 음악계 일각에서 그의 유족과 함께 채동선기념사업협회(회장 박용구·이사 김만폭 김종영 이소난 조양현 채동규 채영철 채영규 이상만 한상자)를 발족시켰다.
이 협회는 앞으로 ▲전집출간 ▲작품레코드 출반 ▲전기출간 ▲기념관설립 ▲음악제개최 ▲음악상 제정 등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채동선 기념사업협회는 우선 미망인 이소난여사가 2천만원을 기탁했고 그밖에 작품저작권수입 등을 기금으로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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