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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차별 안 돼 … 기업총수 가석방해야" 여권 내 기류 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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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 SK그룹은 요즘 한화그룹이 부럽다. 김승연(62) 한화그룹 회장이 복귀하면서 굵직한 인수합병(M&A) 결정에 속도가 붙었기 때문이다. 반면 SK그룹은 M&A는 고사하고 주력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의 하반기 신입사원도 뽑지 못했다. 그룹 고위 임원은 “그룹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에너지 사업이 최악의 상태인데 과감한 대응을 하지 못해 걱정”이라고 말했다.

 #2. A그룹의 한 임원은 올해 송년회가 별로 즐겁지 않았다.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내년 경제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문제에 대해선 거친 말이 오가기도 했다. 그는 “내년에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일을 주도할 재계의 리더십이 투병이나 수감으로 인해 완전히 공백 상태”라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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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감 중인 기업인에 대한 가석방이 세밑 재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4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기 부양에 적극 나서라는 차원에서 (기업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하면서다. 김 대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청와대에 (이런 뜻을) 전달할 생각도 있다”고도 했다.

 재계에선 이번 논의가 사면이 아니라 가석방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혜가 아니라 가석방 요건을 갖춘 기업인은 역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가석방은 형기를 3분의 1 이상 마친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다. 판사·변호사·교수 등으로 구성된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도 통과해야 한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8일 “일반인도 일정 형기가 지나면 가석방 등을 검토하는 것이 관행”이라며 “기업인이라고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가석방 대상이 될 수 있는 기업인은 최태원(54) SK그룹 회장, 최재원(51) SK그룹 부회장, 구본상(44)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이다. 이재현(54) CJ그룹 회장, 이호진(52) 전 태광그룹 회장 등은 수감 기간이 짧은데다 아직 최종 판결이 나지 않아 사면 대상은 될 수 있지만 가석방은 어렵다.

 재계에선 특히 최태원 SK 회장에 대한 가석방 청원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최 회장은 내년 1월이면 4년 형기 중 만 2년을 복역하게 된다. 대기업 회장 중에선 최장 기간 복역이다. SK그룹은 총수 공백 기간인 지난 2년간 굵직한 사업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다. 지난해 3월엔 인도네시아 국영 석유업체인 페르타미나사의 화학사업 합작사 선정(5조원 규모)에서 태국 업체에 밀려 탈락했다. SK텔레콤은 보안업체인 ADT캡스 인수를 포기했다.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는 “대규모 투자나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꼭 해야 할 사업은 총수가 없으면 결정하기가 어렵다”며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조건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봐주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를 위해 일종의 ‘경제적 노역’을 시키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재발 방지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없이 재벌 총수에게 사법적 온정을 베풀 경우 사법 공정성에 대한 불신만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구속 상태는 아니지만 재판을 받는 동안 건강이 악화된 기업 총수도 많다. ‘재계가 아니라 병동’이란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특히 이재현 CJ 회장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이 회장은 최근 홍역 바이러스에 감염돼 고열과 함께 온몸에 발진이 생겨 위급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근무력증을 동반하는 샤르코마리투스(CMT)병을 앓고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다 지난해 8월 신장이식 수술 이후 면역력까지 떨어져 가족도 면회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70~80㎏에 달했던 몸무게는 현재 50㎏에 불과하다.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구속집행정지 결정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다.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조석래(79) 효성 회장도 심장부정맥과 담낭암, 전립선암 같은 각종 질병으로 수차례 재판 일정이 연기됐다.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은 간암 때문에 병 보석을 받아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어떻게든 재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새누리당의 한 주요 당직자는 25일 “다음주 최고위원회의에서 가석방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의 김성수 대변인은 “대한항공 조 전 부사장 사건으로 기업 윤리에 대한 국민의 잣대가 엄격해진 상황에서 부적절한 견해”라며 “재벌 총수에게 면죄부를 주는 관행은 끊어져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기존 발언과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박지원 의원은 이날 “고위 공직자나 기업인을 우대하는 것도 나쁘지만 불이익을 주는 것도 나쁘다”며 당 입장과 다른 견해를 밝혔다.

 가석방 허가 권한을 가진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신중하다. 그는 24일 “원칙대로 공정한 법 집행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만 말했다.

김영훈·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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