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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노후대책 걱정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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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릴 때부터 셈에 어둡더니 아직도 신문에 나오는 재테크 기사를 읽으면 대여섯 줄 뒤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오고, 누가 보험연금상품 설명을 친절하게 해줄라치면 미안하게도 2분 이내에 눈의 초점이 풀리면서 앞이 부예진다. 참으로 큰일이다. 국가의 노후복지대책이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나라의 국민은 재정금융 전문가 뺨치게 정책이 바뀔 때마다 쏙쏙 알아듣고 기동타격대 출동하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분양사무소 앞에 줄 서고, 금융상품 어지럽게 갈아타고 증권사 전광판에 불 반짝반짝 들어오는 거 초조하게 들여다보는 뭐 이런거 하나쯤은 할 줄 알아야 노후대책이라도 세우는 데 말이다. 오죽하면 모기지론이 사자성어인가 했다가 친구들한테 모진 구박을 받기도 했다. 띄어쓰기를 잘못한 은행도 책임이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노후가 걱정이다.

지금의 노인복지는 잘은 모르지만 우리집의 예를 보면 서울의 살인적 물가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쥐꼬리만한 연금과 경로우대증으로 버스.지하철을 무료로 타는 것이 다인 듯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열심히 차 놔두고 대중교통 무료이용의 혜택을 십분 활용하며 즐거워한다. 외출 다녀오면 꼭, 당신이 노인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전철이 무료라는 것과 버스도 공짜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강조하신다. 나는 우리 어릴 적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컸을 정도로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한 대가가 겨우 경로우대증에 버스 회수권이냐고 입이 뭐같이 나오는데도, 평생 공짜라고는 모르고 살아 온 아버지는 지하철이 무료라는 사실에 늘 탈 때마다 맘이 셀레는 모양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얼른 옆에서 고궁.박물관 입장도 무료라고 맞장구친다. 이 땅의 백성들은 참으로 어질다.

언젠가 정부에서 복지 관련 일을 하는 분이 우리나라에 노인들을 위한 시설과 혜택이 적은 이유 중 하나가 부모님을 모시는 미풍양속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전통 미덕일지는 모르지만 삐딱하게 보면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일종의 직무유기다. 적어도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말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육아에 노부모 봉양까지 하는 젊은 부부에게 우리 정부는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라 국가경쟁력이 떨어지네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평생 세금 내고 가정과 나라를 위해 일한 은퇴자들에게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는 양로원과 의료혜택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지금은 도저히 품위를 지키고 살 수 없는 열악한 시설의 양로원이나,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면 못 가는 사설 양로원밖에 없는 양상이고, 국민연금은 낼 때마다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 금리는 땅에 떨어지고, 부동산은 양도세.종토세 무서워 보유하지 못 하고, 주식은 몰라서 못 하는데 이 땅의 나와 같이 이재에 어두운 이들은 '쿼바디스, 나의 노후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재테크 지진아를 위한 이상향은 이런 나라다. 안심하고 버는 대로 다 쓰고 기부해 국내경기 살아나게 소비를 진작시키고 아름다운 기부문화 정착시키면, 은퇴하고는 정갈하고 살뜰한 국가 노인요양시설에서 오순도순 황혼을 보낸다, 뭐 이런 것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세금이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세금 내는 게 좋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그래도 확실하게 이렇듯 노후가 보장된다면 난 무거운 세금도 기꺼이 내겠다. 지금은 집 장만 하느라고 돈못 써, 집 사고 나면 노후준비 하느라고 돈 못 써… 경제가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 하여간 이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신문 경제면을 펴고 재테크 연구한답시고 들여다보다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는 나날이 계속될 것 같다.

배유정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