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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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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문구가 농업중학을 나와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신촌 모래내 근방에서 떠돌아다니며 갖가지 일용잡부로 일한 얘기는 그의 '장한몽'이나 '관촌수필'에 몇 대목씩 나온다. 그가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겠다 생각한 것은 집안 내력도 그렇고 당시까지 연좌제가 엄연히 존재하던 사회라 다른 일로는 장사밖에는 할 일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가 문인이 된 다음에도 어쩌다가 집안 일이 생겨 고향에 가면 형사가 꼭 찾아와서 동향을 묻고 확인하고 갔다고 했다. 그는 생각하기를 '오냐, 문인이 되자. 소설가는 저 혼자 글 써서 먹고 살 수 있을 테니까'했다는데 자신의 집안 내력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리 천업으로 보이지는 않더란다. 그래서 소설을 써 가지고 김동리를 찾아갔는데 다른 이는 모두 그의 고사성어나 충청도 사투리가 옛날 민담 식으로 구사된 길다란 그의 문장을 매우 고리타분하고 난삽하게 여겼지만 김동리만은 그의 글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부터 우익 진영의 논객으로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던 김동리는 개인적으로는 이문구와 같은 처지의 후배를 감싸 주었다. 그래서 그는 김동리를 부친처럼 알아모셨다는 것이다. 김동리가 당시에 말썽 많던 문인협회 이사장에 출마할 때면 으레 선거 참모는 이문구가 맡았다. 김동리의 상대편 경쟁자는 조연현이었는데 그쪽의 오른팔은 조정래가 맡았고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문단 선후배이면서 마주치면 눈을 곱게 뜨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 다 내 또래라 엇비슷하게 친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이문구하고만 친해졌다. 이문구는 나름대로 자기 속내는 우리 측에 두고 독재시대의 여러 가지 저항적인 행사와 조직에 관여했지만 조정래가 그 무렵이나 이후에도 우리네 근처에 왔던 일은 없었다. 이문구가 청진동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그는 문협 이사장 선거를 치렀고 '현대문학'이란 그때만 해도 막강했던 월간 문예지의 편집권을 쥐고 있던 조연현 조정래에게 참패했던 것이다. 이문구가 당장에 머리를 삭발하고 만취한 모습을 보고 나는 어느 정도 이해를 했지만 주위 젊은 문인들은 도저히 이문구의 평소 사람 됨됨이로 보아 이해할 수 없다고 수군댔다. 나중에 팔십년대에 김동리가 김남주를 적색분자로 몰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석방운동을 공격했을 때에 '자실' 회원들이 성명서도 내고 반론도 쓰면서 항의를 했고 이문구는 개인 의리를 지키며 그들과 반목했다. 특히 김동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그와 심하게 다툰 것은 역시 가장 친한 사이이던 박태순이었다.

나는 청진동 한국문학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날따라 저녁 때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짬뽕과 군만두 시켜서 소주를 나누어 마시면서 그의 내력을 들었다. 그가 어려서 친척 집에 맡겨져 소 먹이는 아이로 얹혀살던 때의 일은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촌에서 겨울밤이 길건만 아홉시쯤 되면 문간방에서 뒤척이던 이문구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고 한다. 그 집 식구들이 고구마를 쪄서 동치미를 떠다가 먹는 소리가 마당을 건너 들려오는데 무쪽 씹는 소리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고.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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