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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나타났다 어디로 사라지나 했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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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밤 10시30분쯤 서울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9호선 신논현역). 빗방울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궂은 날씨였지만 이곳으로 트럭이 한두 대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방한 점퍼와 스웨터·양말 등 옷가지를 파는 트럭이 있는가 하면, 스마트폰 배터리나 케이스, 블루투스 이어폰, 보온 장갑에 벨트·지갑까지 파는 잡화상 트럭도 눈에 띄었다. 다른 곳이라면 인적이 드물어 이미 영업을 끝냈을 시간에 어떤 손님을 기대하고 이렇게 트럭 좌판을 연 것일까. 이들은 모두 대리기사를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이다.

일요일만 제외하고 월~토요일 밤이면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 일대에 대리기사를 상대로 한 장이 선다. 지난 11일 새벽 1시쯤 9호선 신논현역 출입구 앞엔 발열조끼나 건강식품을 파는 좌판이 벌어졌고(1), 또 다른 보도에는 방한복·방한화, 그리고 스마트폰 관련 제품을 파는 좌판이 보였다(2). 대로에는 먹거리 트럭이 허기에 지친 대리기사들을 끌어모았으며(3), 대리기사를 실어나르는 셔틀봉고차도 여러 대 있었다(4).

 8년 전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해오고 있다는 노모(56)씨는 “손님 90% 이상이 대리기사”라며 “일하는 데 필요한 스마트폰 관련 소모품이나 방한용품 등을 판다”고 말했다. 잡화상 최고 인기 품목은 휴대폰의 보조 배터리다. 노씨는 “휴대폰에 배차프로그램 앱(App)을 깔고 계속 콜을 확인하기 때문에 대리기사들 스마트폰 배터리는 2~3시간 만에 나가기 일쑤”라며 “배터리가 돈벌이에 직결되기에 보조배터리를 많이들 산다”고 했다. 강추위가 시작되기 전부터 보온장갑도 인기였다. 손님 차를 직접 몰기 전까지는 주로 밖에서 대기하는 때문에 보온용품이 필수인 거다. 노씨는 “사실 지금은 조금 이른 편이고 손님이 가장 북적이는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어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새벽 1시가 가까워지자 노씨 말대로 좌판은 더 늘어 트럭이 10대까지 불어났다. 판매 품목도 다양했다. 전등을 환하게 밝히고는 보온화·구두를 파는가 하면 교보타워 앞 대로 찻길엔 먹거리 트럭까지 들어섰다.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출입구(6번)쪽에선 구찌뽕·개똥쑥 같은 건강식품을 팔고 있었다. 건강식품을 파는 이모(57)씨는 “대리기사들은 다 골골한 환자”라며 “낮과 밤을 거꾸로 살아가니 몸이 성하지 않다”고 말했다.

 트럭마다 손님이 제법 많았지만 가장 많은 곳은 역시 먹거리 트럭들이었다. 새벽 2시가 다가오자 분식 트럭 앞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깨를 부딪혀가며 다닥다닥 붙어서 우동 국물을 마시고 떡볶이를 입에 물었다. 떡볶이 1인분에 1500원으로, 다른 노점보다도 훨씬 값이 쌌다. 지갑이 얇은 대리기사들이 주 고객이니 가격을 그에 맞출 수밖에.

 아내와 함께 소시지를 파는 윤모(56)씨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은 각지에 흩어져 일(대리 운전)을 하다가 기사들이 모여드는 새벽 2~4시”라며 “이곳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는 대리기사들의 터미널”이라고 말했다.

 트럭 사이로 은밀하게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수 대출 해주는 업체 사람들이다.

 10년 넘게 이곳에서 장사를 했다는 한 상인은 “평소 일수 전단지 나눠주는 사람이 대여섯 명은 된다”고 말했다. 일수 업체는 길목에 대출 홍보물을 세워두거나 먹거리 트럭에 사탕 달린 명함 크기 전단지를 슬쩍 놓고 가기도 한다. 대출금은 30만~100만원선인데, 말이 일수지 대리기사가 은행 계좌에 직접 입금하거나 대리기사업체가 수수료를 떼는 계좌에서 직접 빼간다.

 대리기사들이 이처럼 강남 한복판에 모이는 건 이곳이 말 그대로 셔틀 봉고차(승합차) 터미널이기 때문이다. 인천·부천·수원·안양·의정부·구리 등 서울 외곽 도시를 오가는 것은 물론 강남권인 거여·마천·잠실을 순환하는 셔틀 십여 대가 오전 4시30분까지 수시로 대리기사를 싣고 또 내려놓는다. 셔틀을 운행하지 않는 일요일(월요일 새벽)과 공휴일이 자연스레 이곳 상인들의 휴일이다. 승합차뿐 아니라 15인승 버스도 있었는데 차량 앞에 ‘수원·안양·강남’ 식으로 행선지를 붙여 놓은 학원 차량도 많이 보였다. 대리기사 윤모(51·부천)씨는 “여기서 부천까지는 3000원, 더 먼 거리는 5000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른 대로에서는 택시 기사들이 행선지를 외쳐대고 있었다. 집 방향이 맞는 대리기사를 여럿 합승시키려는 거다. 대리기사 신모(53)씨는 “목동까지 가려면 택시비가 1만2000원쯤 들지만 늘 4명이 나눠 타 3000원만 낸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풍경은 어제 오늘 벌어진 일은 아니다. 벌써 10년 넘게 반복돼오고 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일부 주점에 고용된 기사들이 손님 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지금과 같이 전화 한 통에 대리기사가 찾아오는 방식은 200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호 한국대리운전협회 사무처장은 “2002년 월드컵 이후 국민 의식이 높아지면서 음주운전은 범죄라는 인식이 강해졌다”며 “이에 따라 대리운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스마트폰 같은 IT기기 발전이 한 몫 했다. 대리운전 초기만해도 대리기사들은 배차를 받기 위해 무전기나 PDA(휴대용 단말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대중화하고 배차 프로그램 앱이 개발되면서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대리기사를 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대리기사들이 모이는 거점이었다. 김 사무처장은 “강남 일대는 원래 회사와 유흥주점이 많은 대표 지역이라 자연스레 여기가 셔틀 터미널이 됐다”며 “여기 외에도 여의도 증권가나 합정, 광화문 지역에도 터미널이 있지만 강남이 규모가 가장 크다”고 말했다.

대리기사를 상대로 일수 대출을 하는 업자들이 설치한 홍보물.

 문제는 도로·보도를 점거한 노점상이나 셔틀 봉고차 운행, 합승 택시 운행 모두 불법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단속은 여의치 않다. 노점상 단속을 맡은 서초구 도로관리과 관계자는 “(구 전 지역을) 밤 10시까지 단속한다”며 “새벽 시간대까지 단속하기에는 인력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또 “그래도 한 달에 한 두 차례 단속을 나가 구두 경고를 하는데 사라졌다가도 금세 다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송파경찰서는 지난해 8월 셔틀 봉고차 50여 대를 적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당시 수사를 맡은 한 경찰 관계자는 “돈(탑승료)이 오가는 모습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지금까지 교통경찰은 사고 조사와 교통 정리에 중점을 둬 왔다”며 “셔틀 봉고차 적발 같은 교통범죄를 전담하는 팀은 지난해 2월 송파서를 포함해 4개 서(署)에 처음 만들어져 지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취객과 대리기사로 왁자지껄했던 교보타워 사거리는 마지막 셔틀이 떠나간 직후인 오전 5시가 가까워지자 비로소 조용해졌다. 빌딩 입구에서 추위를 피하던 대리기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이들을 상대하던 상인들도 물건을 정리했다. 그리고 오전 6시, 언제 그랬냐는 듯 이 거리는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로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글·사진=조한대 기자 c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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