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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진 기자의 맛난 만남] 유니버설 발레단 문훈숙 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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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만 먹고사는 것 아니었나"고 농을 던지자 장난스레 웃어 보인다. 발레 동작처럼 우아한 손놀림으로 막 세 조각째 피자를 집어든 참이다. 맑은 표정의 하얀 얼굴, 가볍게 흔들리는 기다란 목. '물가의 수초(水草)'라는 별명은 여전히 유효했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무대에서 내려왔어도 그는 '발레리나 문훈숙'이다.

"한창 춤추던 때나 지금이나 음식을 잘 먹는다. 피자.파스타 등 이탈리아 요리와 초콜릿.과자 같은 디저트류를 좋아하는데, 처음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더라."

토마토와 오이, 모차렐라 치즈를 신선한 드레싱으로 버무린 샐러드와 루콜라(허브의 일종)를 가득 얻은 피자. 탁자 위가 푸짐하다. '풀만 먹고 살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발레리나에게 고열량 음식은 필수. 하루 10시간 이상 강도 높은 연습을 계속하기 위해서란다.

"이제는 저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젓는다. 3년 전 발가락 부상을 계기로 수석 무용수 자리를 떠나면서 체중이 4~5kg 정도 늘었다. '현실적인 체중'을 갖게 되는 동안 생활도 변했다. 무대가 아닌 책상에 익숙해졌다. 아름다운 연기에 몰두하던 '발레리나'에서 발레단의 운영을 고민하는 'CEO(최고경영자)'가 됐다. 발끝이 아닌 발바닥으로 땅을 딛게 된 셈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경영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인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컸다. 다행히 금세 나름의 방식을 찾았다. 앞으로 나서기보다 뒤에서 꼼꼼히 뒷바라지하는 CEO, 뛰어난 이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결점이 되는 역할을 택했다."

아늑하게 퍼지는 재즈 선율에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리듬을 탄다. 음악 덕분에 음식이 더 맛있다며 미소를 짓는다. 경영자 자리에 익숙해졌다지만 요즘도 음악을 들으면 몸이 먼저 움직인다. 업무가 밀려도 매일 3~4시간을 단원들과 연습실에서 보낸다.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직접 시범을 보이며 연습한 동작을 설명한다. 16년 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러시아 키로프 극장에서 춤추던 모습이 겹친다. "문훈숙 같은 발레리나를 또 한 명 보기까지 아마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란 찬사를 받았다. 요즘의 그에겐 자신의 지도로 후배의 춤이 나아지는 것과 무럭무럭 자라는 두 아이가 가장 큰 기쁨이란다. 세 살 때 입양한 아들이 벌써 중학교 2학년. 지난해 입양한 두 돌 된 딸은 엄마처럼 발레리나가 되는 게 꿈이다.

부드럽게 거품을 낸 카페라떼가 그의 앞에 놓인다. 따스한 커피향을 빌려 묵혀온 질문을 꺼냈다. 그를 이야기할 때, 발레 다음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결혼. 통일교 신자인 그는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차남과 약혼했다.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약혼자가 교통사고로 숨지자, 스물한 살의 그는 '영혼 결혼식'을 택했다. 자신의 이름인 '박훈숙'을 버리고 '문훈숙'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한껏 뛰어오른 그의 춤처럼 지상의 잣대로는 헤아리기 힘든 이야기. 20여 년 전의 결정은 그에게 얼마만큼의 무게를 남겼을까. 다른 인생이 가능했을 거라고 중얼거린 적은 없었을까.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아니면 뭔가 '뒷거래'를 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그가 싱긋 웃는다. 커피잔으로 떨어뜨린 눈빛이 차분하다. "하지만 나는…. 아주 긴, 약혼기간을 보내고 있노라 생각한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부부가 함께이기에 겪는 어려움이 있듯, 나에게는 혼자 남았다는 어려움이 주어진 것이다."

시련의 성격이 다를 뿐, 자신의 고통이 다른 이들보다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비로소 평생 발레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을 잇는다. 길을 한참 가고 있을 때는 몰랐다. 마침내 길에서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자 그 험한 굽이굽이에 숨은 행복과 만족이 보이더란다. 그래서, 지금도 끊어진 길을 바라보며 뒤돌아 서있다는 말일 게다. "나는 지독한 로맨티스트"라며 시선을 맞춰 온다. "그가 내 곁에 없어도 그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 얼마나 로맨틱한가. 나는 그런 사람이다."

글=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더바도포(THE BAR dopo)'

예술의전당 인근에 위치해 공연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맛집. 두툼한 샌드위치와 담백한 이탈리아식 피자, 직접 구워내는 티라미수 등이 대표 메뉴다. 샌드위치.피자 1만원선. '도포(dopo)'는 '애프터(after)'란 뜻의 이탈리아어. 공연 관람 후 여운을 즐기는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붙인 상호다. 예술의전당에서 서초역 방향 제일은행 골목. 02-583-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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