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을 심어주고 결실 기다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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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연초가 되면 신춘문예 당선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설왕설래로 문단만이 아니라 예술계가 전반적으로 활기에 찬다.
그러나 올해 연극계는 정초부터 별 신명이 없다. 신춘문예 희곡부문이 아주 부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중을 두고 있는 심사위원들이 한결같이 「가작」정도밖에 내지 못했고 (어떤 신문사는 아예 가작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국립극장 장편희곡모집에서도 그 가작조차 내지 못하는 흉작이었다.
지난해 대한민국 연극제 창작극 부문이 만장일치의 호응을 얻지못한 수상이었고 82년을 결산한 「서울극 평가그룹」상도 희곡부문에 열광적이 아니었다는 점등으로 해서 우리의 희곡문학이 부진하다는 사실은 숨길수가 없는 것처림 보인다.
부진한 창작극-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오히려 해마다 너무 뛰어난 작품들이 계속 나오면 그것이 그 「변괴」인 것이다. 예술작품이 숨들이킬 겨를도 없이 명작·거작으로 계속 쏟아진다면 그것은 천재의 시대, 기적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진한 창작극은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극시인들의 정신적인 나들이를 뜻할수도 있다. 그렇게 쥐면서 자기성찰에 들어가고 도약을 위한 준비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 희곡문학에는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 가능성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 극작가의 주변을 말끔히 가셔주어야 할 우리가 오히려 작가들의 부진함만을 질책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무를 마다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작태가 된다.
지난 몇십년 창작극 부진을 개탄하면서 우리는 작품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비평가들을 욕했고 예술가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적·문화적 풍토를 한탄했으며 제대로 고전작품 하나 남기지 못하는 극작가들을 손가락질했다.
이제 우리는 재능의 한계를 실감한다. 그리고 그 재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수 없음을 알게된 것이다.
동시에 그런 천적의 재능이 담긴 작품을 알아낼수 있는 수식안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를 회의하고, 우리가 창작극을 순수하게 지원할 의욕이 있는가를 반성하고 극작가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는가, 자문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연극예술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진정한 극시인과 사이비 예술가를 구별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에술작품을 분석·파악하지도 못했으며 예술가의 비전과 우리 공동체의 젊은 감각과 꿈이 실현되도록 지원해 주지도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창작극 내지는 우리의 희곡문학이 부진한대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고무적이다.
작품을 써도 상연될 기회가 없고 기껏해야 신춘문예당선 원고료 기십만원정. 의욕을 돋을 시상제도를 갖고있는 것이라고 했자 문학사상과 실험극장의 1백50만원 희곡모집이며, 삼성미술문화재단의 도의문화저작상(희곡)의 2백만원 고료, 그리고 2백만원을 내건 국립극장의 장막극곡 모집뿐이다.
명예는 거명되는것 뿐이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무런 혜택이 없는 가운데 「극예술」을 지켜나가는 극작가 및 연극인들은 진정 문화영웅들이라 할만하다.
그들의 무능을 꾸짖고 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그들의 무지와 시행착오와 아집에 침뱉고 돌아서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긍지와 정진, 그리고 비타협의 자세에 박수를 보낸다.
이 세속사회에서 그래도 구도자의 길을 걷는 「어둠의 빛」(하이데거)이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진한 희곡문학의 골목길에서 그 골목이 대로에 이르는 골목길임을 믿고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부민이 부진의 어둠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이나 아닌가 두려워 하는 것이다.
1, 2년의 부진함에 안절부절 못하고 5년, 10년에 업적을 강요하고 고전을 구하는, 그런 짧은 호흡법이 우리의 결함이라면 결합이라 할것이다.
세속적으로 우리는 「문예진흥」을 위한 여러 방법을 대강 강구해 보았다. 그리고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못한 줄 알면서 우리는 참으며 남은 세윌에 기대를 모은다. <성대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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