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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산타, 자선 베푸는 성인에서 대중소비 아이콘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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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20면

그림 1 성 니콜라우스를 그린 이콘(왼쪽)과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코카콜라 광고. 과묵하고 진중한 인상의 니콜라우스와 호탕하게 웃는 산타클로스가 대비된다. [사진 코카콜라]

성 니콜라우스는 4세기에 활동한 성직자로 오늘날의 터키에서 태어났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해 삼위일체설을 기독교의 정통이라고 결정하는 데 참여한 주교 가운데 하나였다. 교리를 둘러싼 입장보다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그가 생전에 보여준 수많은 자선활동이었다. 지참금이 없어 사창가에 팔려갈 위기에 처한 세 처자를 위해 몰래 금화주머니를 전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선행으로 꼽힌다. 그의 선행이 무척이나 다양했던지 훗날 그는 선원, 궁수, 전당포업자, 그리고 어린이의 수호성인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18> 산타클로스 이미지의 상업화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산타클로스 모습의 전형이다. 콜라를 여름에만 팔리는 음료가 아니라 사철 음료로 재탄생시키려는 기업 전략에 따라 1931년에 광고회사 다아시(D’Arcy)가 기획하고 선드블럼(Haddon Sundblum)이 그림을 그려 제작한 광고 시리즈였다. 이 광고 시리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거기에 등장한 마음씨 좋게 생긴 혈기 넘치는 뚱보 할아버지의 모습이 소비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진 것이다. 선드블럼이 그린 산타클로스는 오늘날까지도 경쟁자 없이 거침없는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사슴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차가운 겨울 밤하늘을 가로질러 착한 아이들이 사는 집에 굴뚝을 통해 들어가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주는 산타클로스는 세계인이 공유하는 통일된 이미지다. 크리스마스를 더운 계절에 맞이하는 남반구나 저위도 국가들에서도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성 니콜라우스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풍채 좋은 산타클로스로 변신한 것일까? 먼저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문화가 영향을 끼쳤다. 중세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에 유럽의 게르만족들은 다양한 겨울 축제를 즐겼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율(Yule) 축제였다. 추운 겨울에 유령의 무리가 밤하늘을 뚫고 행진을 하는데, 무리를 이끄는 이는 오딘(Odin)이라는 이름의 신이다. 이 신은 긴 턱수염에 망토를 입고서 회색 말들이 끄는 탈것을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중세 초기에 유럽 전역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오딘의 모습이 전파돼 오늘날의 산타클로스와 부분적으로 비슷한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됐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인 12월 6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관습이 굳어졌다.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인 크리스마스는 4세기 이래 12월 25일에 기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축하 만찬은 더 화려해졌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축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을 받았다. 중세 후반 종교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마르틴 루터는 아이들이 선물 받는 날로 성 니콜라우스 축일 대신 크리스마스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성공회를 도입한 영국에서도 성 니콜라우스 축일을 더 이상 중시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판 산타클로스인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가 12월 25일에 등장하는 것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인물이 여럿이다가 점차 성 니콜라우스에 기초한 신터클라스(Sinterklaas)로 통일되어 갔다.

하지만 산타클로스가 결정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은 미국에서였다. 1624년 네덜란드의 이주민들이 미국 북동부의 한 해안지역을 정착지로 삼고서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했다. 1664년 이 지역을 점령한 영국인들은 뉴욕으로 개명을 했다. 이곳에서 정착한 네덜란드계와 영국계 이주자들은 자국에서 들여온 크리스마스 풍습을 받아들여 혼합된 문화를 만들어 갔다. 산타클로스라는 이름도 네덜란드의 신터클라스가 미국식으로 발음이 변형되어 생겨난 것이었다.

그림 2 토머스 내스트 ‘산타클로스의 방문(1872년)’. 빨간 모자가 아니라 화환을 쓰고 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졌다. 1823년 미국인 클레멘트 무어(Clement C. Moore)가 지은 ‘니콜라우스의 방문’이라는 시가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그에 따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클로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풍습이 퍼졌다. 그렇지만 산타클로스의 전형이 갖춰진 것은 19세기 중반 독일 출신의 삽화가 토머스 내스트(Thomas Nast)에 의해서였다. 내스트는 1863~86년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32장 그려서 인기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실었다. 그림 2는 그가 1872년에 그린 작품이다. 뚱뚱한 몸매에 흰 턱수염이 가득하고, 흰털을 덧댄 빨간 외투를 입고 있다. 굴뚝으로 들어와 아이들이 걸어놓은 양말 속에 선물을 남기는 인물로 산타클로스가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산타클로스와 다른 유일한 차이점은 빨간 모자가 아니라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화환을 머리에 쓰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림 3 1858년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산타클로스의 모습. 수염이 없는 게 이채롭다.

1858년 같은 잡지에 실린 산타클로스의 모습(그림 3)은 사뭇 달랐다. 이 산타클로스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낯선 복장을 하고 있으며, 칠면조가 끄는 썰매를 타고 있다. 내스트의 그림이 나오기 불과 5년 전까지도 이렇게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다양했다. 산타클로스의 표준 초상이 실질적으로 완성된 것은 내스트의 손끝에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타클로스의 이미지와 크리스마스가 상업화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1875년에는 영국에서 먼저 제작되었던 크리스마스 카드가 미국에 도입되었다. 크리스마스 카드의 상업적 잠재력을 인식한 독일 이민자 출신의 루이스 프랑(Louis Prang)은 매사추세츠에서 수백 명의 종업원을 고용, 카드를 대량으로 제작해 판매했다.

한편 백화점들은 화려한 전구 장식으로 사방을 장식하고서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영국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이 상징하듯이 가족이 모여 오붓하게 지내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는 빅토리아시대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형태로 전환된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 경제와 문화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산타클로스도 세계적 유명세를 탔다. 새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필리핀에서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빨간 외투의 산타클로스가 등장했으며 서구 문화와 거리가 먼 태평양 도서국가의 아이들도 선물을 받으려고 양말을 내걸었다.

마침내 1931년 코카콜라의 역사적인 산타클로스가 등장했다. 때는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창 짙어지던 시절이었다. 선드블럼이 그린 산타클로스의 호쾌한 표정은 전통적인 비수기인 겨울철에 콜라의 소비를 급증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불황과 실업으로 짓눌린 마음을 잠시나마 풀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이렇듯 시대적 분위기를 잘 잡아낸 덕에 코카콜라의 산타클로스는 전설적 광고의 반열에 올랐다.

자선의 정신을 상징했던 동로마의 성 니콜라우스는 비기독교 풍습과 신교적 문화의 영향을 받고서 산타클로스로 변신했고, 미국에서 본격적인 상업화를 거친 후 다시 전 세계로 전파돼 대중소비의 아이콘이 되었다. 세계화는 진로를 미리 예상하기 힘든 참으로 길고도 복잡한 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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