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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경제를 위해 국회가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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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수은주의 높이만큼이나 온 국민의 흥분을 자아냈던 시간들이었다. 선선한 가을과 더불어 정기국회가 시작된 이제부터는 나라의 앞길을 좀 더 냉정히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애써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틀을 흔들지 말고 팽배한 위기감에 휘둘리지 않으며 선진화로 나아가는 대행진에 과연 누가 앞장을 설 것인가.

▶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

9월 1일 정기국회가 개회되었다. 국민은 다시 한번 속는 셈치고 우리가 뽑은 국회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런데 그 국회는 어려운 때일수록 국정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듯싶어 국민으로서는 허망하고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이미 여러 번 지적한 대로 권력만 있고 책임은 지기 어려운 현행 '대통령무책임제'에 묶여 있는 대통령으로는 국가적 위기 타개에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가 그의 좌절감을 국민에게 실토하고 있지 않은가. 헌법 개정을 비롯한 제도 개혁을 시도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으며 지지기반도 너무 취약하다. 따라서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듣고 있는 국회가 국민의 뜻을 모아 새로운 국가 발전, 특히 경제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우리가 국회에 대해 이처럼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민주정치의 중심 무대인 의회가 지닌 고유의 기능과 잠재적 저력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첫째, 국회는 모든 지역과 여러 직능을 고루 대표하며 사회의 다원성(多元性)과 그에 따른 이익의 다양성(多樣性)을 행정부나 사법부보다 월등하게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둘째, 국회는 그러한 다원성과 다양성이 국민을 분열보다는 통합으로 이끌 수 있도록 민주적인 운영절차와 관행에 따른 타협의 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 타협이 없는 국회는 이미 의회의 기능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셋째, 국회는 법을 만드는 입법부로서 헌법을 비롯한 많은 법을 만들 뿐 아니라 이들을 앞장서 지켜나가야 한다. 넷째, 국회는 나라와 정치와 국민생활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주체다. 대통령, 특히 단임제 대통령과는 달리 국회의원의 정치적 생명은 결코 짧지 않다. 우리 국회에는 6선의 의장을 비롯한 다선 의원들이 적지 않게 포진하고 있으며, 지난 선거에서 대거 진출한 초선의원들도 재선.3선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회의 연속성은 나라와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기 임기 안에 결판내려는 독선을 제어하고 국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정치적 여유를 마련해 준다.

이렇듯 우리의 기대를 업고 있는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지금 국민이 제일로 꼽는 국정의 과제인 경제에 대해 우선적으로 합의점을 찾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어디를 가든지 경제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최대의 시급한 과제라고 국민의 소리는 일치하고 있다. 모든 여론조사가 국민의 소리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모르는 국회의원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분명한 국민의 소리가 왜 국정이나 국회운영의 우선순위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었는가.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경제문제 해결이란 대통령 스스로가 자인했듯이 다른 어느 과제보다도 어렵고 힘들며 좋은 소리 듣기 힘든 난제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극적으로 풀어가며 대중의 호응을 얻기 쉬운 남북관계 개선, 과거사 정리 등 인기 있는 사업이나 안건의 물살에 경제 활성화란 거대한 과제가 밀려버린 것이다. 성공의 가능성은 불확실하고 빠른 승부는 볼 수 없으며 정치적 위험부담은 막중한 경제정책에 정치적 운명을 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기에 단기적 정치타산에 얽매이기 쉬운 정치적 본능을 자제하는 큰 용기가 간절히 요구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우리 경제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국민은 불만과 불안에 싸여 있다. 선진 경제의 모델로 여겼던 독일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한때 우리보다 여섯 배나 높은 국민소득을 누리던 필리핀 경제의 추락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 우리 국민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국회의원들이 정치적 용기를 발휘해 여야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번 정기국회를 한국 경제 재도약의 계기로 만드는 결단을 내려주길 국민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