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해 따라 사실을 왜곡해선 안된다|역사를 보는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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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일 관계사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고 이미 양국간의 많은 역사적 문제에 대해 논구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역사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일 또한 있기 쉽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먼저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될 것이며 역사에 대한 정신적 자세는 어떠해야 되겠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할 것은,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이지 허구가 아니라는 점, 따라서 역사는 사실을 토대로 하고 논해야 된다는 점이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신화화해서 카리스마적으로 만든다거나 신화를 사실화해서 진실로 둔갑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특히 한일 고대사에 있어서 이 자명한 명제가 무시될 우려가 많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변명만 하면 후퇴>
다음은 역사가 사실인 이상 역사 서술도 사실대로 다루어야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갑에게 불리할 때 갑은 이를 무시해서는 안되고, 또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을에게 유리할 때 을은 그것을 사실로 강조해도 안 되는 것이다.
또 같은 사실이라도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침소봉대 해도 안되고 봉대침소해도 옳지 못한 일이다. 특히 한일 관계사 전반에 걸쳐서 위와 같은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실 중에는 국민적 자존심을 손상케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실패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이를 솔직이 시인하고 새로운 성공의 역사를 다짐해야 옳은 것이다. 만일 그와 반대로 실패한 역사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다가는 새로운 창조적 역사의 장은 열려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일 관계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가 유의해야할 점은 피차에 감정 개입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상대방의 감정을 돋우는 어투는 삼가야겠다. 누구나 콤플랙스를 가진 사람은 그러한 과오를 범하기 쉽다. 얼마전 동경에서 박사 과정을 다년간 밟고 있는 학생이 와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은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비판이 감정적이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인은 한국안에서 발표된 글을 모아 이를 일어로 번역해서 분석하였다는데 그 결과가 감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분석이 어디까지 옳고 그른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감정 개입으로 역사 서술의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되겠다.
그러고 보니 1871년 이후 알사스, 로렌스 두 지방의 귀속 문제를 놓고 「모므젠」(독)과「쿠랑제」(불) 두 사학자간의 논쟁이 생각난다. 가뜩이나 승전과 패전으로 두 나라 국민의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이 두 사학자의 감정적 논쟁으로 독·불 양국의 불화는 더욱 높아졌던 것이다.
그러한 일이 앞으로의 한일간에는 없어야 될줄로 안다.

<긴 안목으로 봐야>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긴 안목으로 보면 어느 나라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고 있음을 알수 있다. 좁은 속알머리를 갖고 앞섰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고 뒤떨어졌다고 비굴할 이유도 없다.
불행한 역사를 가진 국민은 현실을 직시하고 권토중래를 꿈꾸어야 할 것이고, 번영하는 역사를 가진 국민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또한 역사가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면 역사란 무엇이며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보통 역사는 과거의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사실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의 사실과 관련이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생명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말하자면 운동과 같은 것이다. 운동에서는 과거도 언제나 현재에 살아 있다. 민족사에 있어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살아 있는 긴밀한 전체인 것이다. 과거는 기억속에, 현재는 직시·체험속에, 그리고 미래는 기대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과거와 부단한 대화>
민족은 인격적 존재다.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없고 모두 현존적 인격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단지 과거로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의 의미 모는 체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실천이요 생활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일찍이 「오거스틴」은 신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임을 말했다. 과거, 현재 그라고 미래적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현재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 현재적 역사 인식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당대의 역사요 현재사라고 했다. 그것은 현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살피게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은 과거여서가 아니고 오직 현재적 관심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E·H·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라고 하였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요,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므로 역사가와 사실과의 관계는 현재와 과거와의 관계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실이 없는 역사가는 공허한 것이요, 그렇다고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이 없고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현재와의 관계에서 생명을 다시 얻게 되고 현재는 과거에서 그 존재의 진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부단한 대화일 경우, 또는 역사가가 현재의 일부인 경우 역사가에 요청되는 것은 현실적 감각 내지 관심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역사적 현실이므로 현실적 감각이 없으면 과거와 대화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현실적 감각을 갖고 과거와 대화한다면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 현실적 과거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는 현실에 무한한 교훈을 주게되는 것이다.
역사는 올바른 현실이 되게 하는 지혜의 공급원이다.
여기서 역사가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한다. 이른바 현실 비관인 것이다. 현실적 관심을 갖고 과거를 조명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지식을 갖고 현실을 비관하고 역사의 길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역사가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진단하는 의사와 같다.
의사가 병을 진단하고 고쳐주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과 같이 역사가도 민족사 내지 세계사의 바른 진로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에 관계되는 학자들은 식민 사관의 청산과 민족 사관의 수립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 사관의 탈피와 민족 사관의 수립에는 권위 (권력)주의의 배격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아쉬운 해방 이후사>
말하자면 현실 비판엔 저항 정신이 필수 조건인데 그런 정신이 없으면 권위에 쉽게 굴복 하든가 아니면 아예 현실을 도피하고 만다.
역사가가 역사적 현실을 비판하지 못한다면 식민 사관의 탈피나 민족 사관의 수립도 불가능할 것이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해방 이후 복잡다단한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비판하는 석학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사는 우리의 역사다.
남의 역사는 시비를 가리면서 또 과거의 역사에 대해선 논단 하면서 앞으로의 한국사에 가장 중요한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비판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모름지기 오늘의 한국사 학자들은 현실 비판의 지혜와 용기를 다져야 할 줄로 안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해도 문제는 언제나 현재, 현실에 있는 것이다. 지금 잘 살아야지 과거에 잘 살았다는 것을 자랑해 보았댔자 소용없다.
과거가 아무리 찬란했어도 현재가 침체하면 부끄러운 일이요, 반대로 과거가 아무리 침체한 역사였다고 해도 현재가 찬란하면 도리어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역사가가 현실을 비판하고 역사의 진로를 바르게 제시해야 되는 것이다. 민족의 병폐를 진단하고 그 치료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면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정치가의 일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집권층이 역사가의 바른말을 꺼려서는 안되고 또 그런다고 빠른 판단을 주저하는 역사가가 있어서도 안되겠다.
역사가는 한 민족의 운명만 아니라 인류의 장래도 진단하고 논단 해야 한다. 지금까지 역사가를 포함해서 많은 석학들이 민족·국가의 특수성·이질성은 강조한 반면 일반성이나 동질성을 등한시해 왔다. 지금 세계 평화는 인류의 지상 명령으로 되어 있다. 세계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이를 선양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 특히 한일간의 사학자들의 임무도 거기에 있어야 된다고 본다.
모름지기 현대 역사가는 민족 속에서 세계를 찾고, 세계 속에서 민족의 의의를 찾아야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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