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의를 지키며…」국내 독점 연재|대통령 선거운동(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레이건」은 정치적 신조·경험·국민들에 대한 약속 등 모든 기본 요소들이 나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지금의 공화당 역시 민주당과는 뚜렷이 다릅니다. 「레이건」의 공화당은 과 거 「아이젠하워」에서「포드」에 이르는 대통령들이 이끌던 정당과는 분명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80년 9월 2일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 읍 주민모임에서 한 연설 중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에 즈음해서 여론조사에 나타난 나의 인기는 하락세를 멈추었다. 25%나 되던 「레이건」과의 격차는 아내 「로절린」의 생일인 8월 18일엔 7%로 줄었다. 이 대전환은 국민들이 「로절린」에게 보내는 훌륭한 선물인 듯 했다.
8월24일 일요일 하오 늦게 나는 전당대회 이후 처음으로 정치 참모들과 모임을 갖고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평가하고 선거대책을 협의했다.
―「패트·캐들」(「카터」의 여론조사 담당자)의 조사 분석결과「앤더슨」(주=무소속 대통령 후보)의 등장으로 우리 지지율은 약6%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후보자들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들에선 내가 유리해지고 있었다. 이중 「레이건」 에 특히 불리한 것들, 예를 들어 「미국을 다시 전쟁에 끌어들일 가능성 같은 항목들은 지금 같은 초기단계에서는 유권자들의 주의를 거의 끌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로 투표에 임할 즈음에는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패트」는 확신하고 있었다.<일기 1980년 8윌 24일>

<「로절린」에 큰 선물>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다음 두 달 동안 정치적으로 가장 유리한 전략은 「레이건」후보와 가능한 한 많은 공개 토론을 벌이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나는 내셔널 프레스 클럽의 토론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레이건」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
정치일선에서의 소식은 회비가 엇갈렸다. 「해밀턴·조던」은 「케네디」쪽으로 기울었던 몇몇 노조에 대한 우려의 설득 작전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려나 한편으로는 진보적 민주당원의 많은 수가 「앤더슨」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나는 민주당 지도자들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는 「버드」(민주당 상원원내 총무)를 만났다. 경제 문제에 대한 그의 조언은 나의 생각과 너무나 흡사했다.
나는 이어 「오닐」(하원의장) 「짐·라이트」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 「알·울먼」 (세입 위원장) 「봅·지아이모」(예산 위원장) 등과 연쇄 접촉을 가졌다. 이런 접촉결과는 아주 만족할 만 했다.
나는 또 「케네디」 상원 의원과도 만나 우리의 가족, 선거운동의 어려움, 그리고 앞으로 친구가 돼야할 필요성 등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일기 1980년 8윌 25일>
우리는 선거 운동을 9윌 1일 앨라배마주의 터스컴비아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76년 내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남부인 들의 강한 지지 덕분이었다. 「레이건」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나는 이들의 지지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터스컴비아 지역을 캠페인 시발지로 결정한 것은 이곳이 남부이면서도 정치 성향으로 봐선 「레이건」쪽으로 쉽게 기울어갈 가능성이 있는 노동자들과 농부들이 많은 보수적인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에는 몇몇 KKK (큐·클럭스·클랜=인종차별 등 보수주의를 내세운 남부 백인들의 비밀결사)단원들이 그들의 제복인 흰옷을 입고『「레이건」을 대통령으로』라는 구호가 적힌 피키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연설장소에서도 KKK 단원들이 나에 대한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나 5만 명도 넘는 군중들 중 시위자의 숫자는 십여 명 가량밖에 안됐다.
「조디·파월」(대변인)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를 상의한 후 나는 KKK단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의외로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이 나라에서 토박이 남부 인으로서는 거의 1백40년만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흰옷을 입고 내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 사람들이 이 지역의 참된 역사와 경험, 우리 나라가 표상 하는 것, 그리고 남부와 미국이 함께 발전해나가야 한다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케네디 의원도 만나>
8O년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는 아직 이란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인 인질 문제였다.
답보 상태가 몇 달 계속된 끝에 이란인 들은 이문제롤 해결하려는 우리의 끈질긴 노력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호메이니」의 밀사가 서독에 가서「겐셔」서독 외상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 왔다. 인질석방 시기에 관해 미국의 고위관리와 회담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것이 의미심장한 진전임을 느꼈다.
그 이란인의 이름은「사데그·타바타바이」였다. 그가 전해 온 제안에는 그 동안 우리가 여러 차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던 요소들은 대부분 빠져있었다.
I「호메이니」는 서독을 통해 우리에게 보낸 제안을 확인하는 연설을 했다. 이어 회교 과격파들은「호메이니」의 말을 거듭 확인하면서 이란의 요구 사항은 이란 자산과 「샤」의 재산반환, 그리고 이란내 정에 대한 불간섭 등에 국한됨을 밝혔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극비사항이었기 때문에 백악관에서의 외교 문제 협의 조찬모임에서도 논의하지 않았지만, 이란과의 교섭준비를 위해 「크리스토퍼」에게 유럽 행을 준비시켰다. <일기1980년 9윌 12일>

<누그러진 이란 제의>
우리는 인질사태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들을 깨지 않는 한도에서 이란측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는 제안들을 마련하면서 차근차근「크리스토퍼」에게 줄 협상 지침을 준비해 나갔다.
이 때 이란 접경지역의 소련군이 증강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우리는 이 정보를 유럽 동맹국들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유럽으로 향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이 새로운 정보를 영·불·서독의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본에서「타바타바이」를 만나게 돼있었던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