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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새 대법원장의 시대적 사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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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반환점을 돈 노무현 정부의 전반기에 대한 평가가 무성하다. 낮은 정부지지도를 볼 때 부정적 평가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은 국가권력의 분권화다.

최근의 도청사건에서도 불거졌듯이 민주정부를 자처하던 김영삼.김대중 정부의 최대 오점은 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으로 이어지는 강압적 지배수단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들 정부는 '사실적 힘의 축'을 통해 헌법이 지향하는 권력분립의 원칙이 무색하게 입법부나 사법부를 수족 부리듯 하는 권위주의적 통치형태를 벗어던지지 못해 또다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됐다.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권력적 사회 통제 수단을 통한 지배를 포기함으로써 이전의 정부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오히려 제왕적 대통령을 걱정하는 목소리보다 권력 공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클 정도다. 그 반대급부로 박정희식 독재의 향수에 젖은 국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다원화에 따른 역사의 진보를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입헌민주체제의 제도적 완성을 위해 이제 남겨진 과제는 독자적 권력으로 성장한 개별 국가권력들 내부의 분권화다. 그 필요성이 가장 큰 것이 사법권력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양두체제로 하는 사법권력은 국가권력구조에서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우월적 지위를 구축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이나 국정최고과제를 무력화했던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 선언, 새만금사업 등 국책사업에 대한 법원의 결정 등 정치적 사안이 사법권력에 의해 해소되는 것이 일상이 됐다. 각종 개혁입법의 운명이 헌재나 법원의 손 안에 있게 된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변화는 행정국가에서 법률국가로, 법률국가에서 다시 헌법국가로 진화한 인류사회의 문명화 과정에 우리도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과에 대한 선호에 따라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법권력을 정점으로 한 헌법국가도 입헌주의의 기본정신인 권력분립의 이상에 철저하지 못할 때 껍데기뿐인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할 뿐이다. 관건은 사법권력의 독립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사법권력의 독립이 다른 국가권력, 특히 제왕적 위상의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면 민주화 시대의 그것은 조직 내부로부터의 독립과 사회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중심이 된다.

개별 헌법기관인 법관들의 양심에 따른 직무 수행을 재판 외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사법행정체계에 기초하는 사법권력은 헌법국가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악이다. 권위주의 시절 대법원장이 인사권을 비롯한 사법행정권을 집권적으로 장악한 수직적 조직체계는 정치권력에 의한 사법권 장악의 수단이었다. 민주화 시대를 맞아 대법원장 중심의 집권체제는 편향된 사회권력의 음험한 영향력에 의해 재판의 독립이 저해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특히 최고법원의 구성이 다원사회의 다양한 사회관계를 대표하기보다는 관료화에 길든 직업법관에 의해 독점되는 현실은 이러한 위험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수직화한 사법권력이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헌법국가는 봉건적 과두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 국민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의 전문법관들의 가치관이 헌법과 법률의 이름으로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사법개혁의 핵심은 사법관료주의의 발호를 통해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저해할 수 있는 수직적.집권적 사법조직체계를 수평적.분권적 체계로 개편하는 것이다. 자율에 바탕한 사법조직 내부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해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른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배경을 가진 대법관을 선출할 수 있는 구조와 분권화된 사법행정체제를 마련해야 한다.

앞으로 사법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대법원장 후보의 국회동의 과정에서 반드시 검증돼야 할 것은 사법권력 독립의 요체인 분권화를 실현할 수 있는 비전과 추진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평가다. 새 대법원장이 대법원과 헌재의 대폭적인 개편기를 맞게 될 노무현 정부의 후반기에 적극적인 사법개혁을 통해 사법국가화의 진가를 확인시킬 분수령을 마련하는 역사적인 대법원장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