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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⑦사회변동] 61. 성장 멈춘 인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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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우리는 애를 낳고 또 낳았다. 경제 수준은 바닥인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다 보니 호구지책이 문제가 됐다. 정부는 “제발 아이를 그만 낳으라”고 난리를 쳤다. 농촌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했다. 땟국물이 흐르던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변동의 주역이 됐다. 먹을 것 걱정이 사라진 요즘, 우리 사회는 ‘출산 장려책 마련’ 이라는 상반된 고민에 직면해 있다. 살기가 복잡하고 앞뒤 재는 것도 많다 보니 자녀를 한 명밖에 두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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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부터 출산 억제 정책

▶ 1970년대 상경해 구로공단의 가발공장에서 일했던 배옥병(왼쪽)·이종도씨가 사진첩을 넘기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그 시절, 자식은 재산이었다. 아이는 여덟 살만 돼도 밭일을 거들었다. 먹을 것이 없을수록 사람들은 자식 농사에 매달렸다.
기와집이고 초가집이고, 대를 잇는 것이 가문의 목표이기도 했다. ‘귀남이’가 태어날 때까지 끝순이·종말이·후남이를 낳았다. “적당히 낳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피임법도, 인공 중절 수술도 몰랐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여성들은 평균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전쟁 뒤 찾아온 베이비붐이었다. 의약품 보급 등으로 사망률도 확 떨어졌다. 인구는 사상 유례 없는 속도로 증가했다.
곧이어 인구 폭발의 ‘경보’가 울렸다. “비좁은 땅에 자원도 없는데 인구만 늘어나니 모두 굶어죽게 생겼다”는 것. 정부는 62년 출산 억제 정책을 시작한다.

이름도 생경한 ‘가족계획운동’. 이장 집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남자에겐 정관 수술을, 여자면 자궁 내 피임장치(루프)를 권했다. 먹는 피임약 ‘린디올’이나 여성용 콘돔 ‘펫사리’는 임시 처방전이었다. 예비군 훈련장은 피임 캠페인의 주무대였다. 정관 수술을 받으면 훈련을 면제해 줬다. 수술 비용도 국가에서 부담했다. 대대적인 출산억제 정책과 산업사회의 생활 여건이 맞물려 출산율은 떨어졌다. 83년에는 합계 출산율(한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 수)이 대체 수준(2.1명, 인구가 늘지도 줄지도 않는 수준)이 됐다.

상경한 꽃다운 청춘들 ‘공장의 불빛’밝혀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전략이 궤도에 오른 7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가 절정에 이른다. 10년 새 서울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2차산업 육성에 필요한 인력이 궁핍한 농촌에서 조달된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찾아든 곳은 주로 대도시 공단이었다.

충남 청양의 열여덟 소녀였던 배옥병(48)씨도 이때 ‘무작정’상경(上京)했다. 그는 5남매의 장녀. 국민학교만 나왔다.

“동생들을 내 손으로 고교까지 보내야지.” 당시 그의 다짐이었다. 옥병씨는 구로공단의 수출용 가발공장에 취직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공이 1200여 명이었다. 그는 재봉틀로 머리카락을 망사에 붙이는 작업을 했다. 한방에서 156명이 재봉틀을 돌려댔다. 머리가 멍멍해지는 굉음 속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다. 처음 받은 월급은 1만2000원. 근무 4년 만에 난청이 생겼다.

옥병씨와 같은 공장에 들어온 이종도(43) 씨는 충남 당진 출신. ‘돈을 모아 못다 한 공부를 하겠다’는 게 그의 상경 이유였다. 하루에 15시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촘촘한 망에 머리카락을 꿰맸다. 월급 대부분은 고향으로 보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은 시집 갈 때 쓰기 위해 계를 들었다.

두 사람은 노동조합 운동에 눈을 떴다. 여공 일을 하면서 다녔던 교회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익혔다.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뛰어다녔다. 둘은 그 옛날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때 농촌에서 올라왔던 우리가 경제발전의 원동력 아닌가요. ”

양육비에 휘청…“결혼해도 안 낳아요”

▶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 정정영·권진씨 부부(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한국 사회는 80년대에 인구 문제에 관한 한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출산율이 적정 수준으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출산율은 큰 폭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생아가 적어지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출산 보조금을 지급하고 무료 보육을 확대하겠다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아예 낳지 않겠다”는 부부는 점점 늘고 있다. 2004년 현재 우리나라 여성의 출산율은 1.16명에 불과하다.

쉐라톤그랜드워커힐의 호텔리어 권진(29ㆍ여)씨 부부. 스스로를 ‘딩크족’ (Double Income No Kids, 맞벌이 무자녀 부부) 이라고 밝히는 이들은 결혼 초에 “아이 없이 우아하게 살자”고 합의했다.

“믿을 만한 탁아소는 한 달에 100만원 가까이 든다고 하네요. 중ㆍ고교 때는 과외, 대학 가면 등록금,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아이에게 들 돈을 모아 편안하고 우아한 노후 생활을 하고 싶어요.”
권씨는 딩크족 선택 이유를 교육 및 양육 부담에서 찾았다. 남편 정정영(31ㆍ휴대전화 디자이너)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다. “친구들을 봐도 아이가 딸리면 제약이 너무 많죠. 우리끼리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지금 생활이 좋아요.”

아이가 없어도 외로울 틈이 없이 바쁘다. 밤늦게까지 클럽에서 놀기도 하고, 갑자기 스키장을 찾기도 한다.

보건복지부 인구정책과 김상희 과장은 “현재 출산율이 유지된다면 2050년 한국 인구는 지금의 절반 수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정부는 육아 지원뿐 아니라 신생아의 전 생애를 뒷받침하는 등 저출산 대책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임미진 기자

‘피임전도사’공무원이 불임부부 도우미 될 줄이야
가족계획 산 증인 신동진씨

▶ 31년전인 1974년 5월, 현재 가족계획협회 저출산대책본부장인 신동진씨가 전북 전주시에서 열린 출산 억제 세미나에서 피임법을 강의하고 있다.

“무턱대고 피임 얘기를 꺼내면 ‘우리 가문의 대를 끊어놓으려 한다’고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죠.”

우리 나라 가족계획운동의 산 증인인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협) 본부장 신동진(59)씨는 갓 협회에 들어온 1968년을 이렇게 떠올리며 웃었다.

당시 가협 직원들은 ‘지역사회 침투요령’이라는 거창한 교육을 받고 홍보에 나섰다. 성에 대해 쉬쉬하던 때라 피임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

1차 정지 작업은 물량 공세로 시작됐다. ‘정기적으로 마을에 들러 구충제ㆍ모기약을 나눠주며 호감을 살 것’‘절대 먼저 피임이나 가족계획 얘기를 꺼내지 말 것’ ….

밭을 매는 아낙네들과 쪼그려 앉아 신세타령을 듣다 보면 반드시 대여섯이나 되는 자식들 걱정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 순간, “그러게 적당히 낳으시지…웬 고생이세요”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 삼신 할머니가 점지하는 자식을 어떻게 적당히 낳는당가.” 되묻는 아낙네들에게 스물 두 살의 총각은 쑥스러움도 잊은 채 가족계획 요령을 설명했다.

“농사 지어 먹고 살려면 자식들이 많아야 한다”거나 “우리 집은 아들이 없어 그만 낳을 수 없다”고 버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키우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는 법. 미리 포섭해 놓은 이장이 “선상님 말씀이 맞어. 먹일 수도 없는 자식을 자꾸 낳아서 뭐혀~” 하고 거들면 비로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피임법을 강의하러 다니던 시골의 고샅이 눈에 선하단다. “피임이라니…”라며 손사래 치던 사람들이 “셋이나 낳았으니 그만 낳겠다”고 정관 수술을 자청할 때 보람을 느꼈다.
“그땐 출산 억제가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 믿었죠.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70년대에는 TV 등 대중매체를 통한 대대적인 홍보도 벌어졌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든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명작’으로 꼽힌다.

신씨는 올 7월 가협의 저출산대책사업 책임자(본부장)로 발령났다. 피임약을 들고 농촌을 누비던 그가 이제는 “아이 좀 낳자”고 젊은 부부들을 설득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라는 출산 장려 표어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죠.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표어가 귀에 쟁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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