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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이란사태 텔터 특공작전(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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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만국에 주재하는 건 영국군장교는 런던의 영국의무성에 대해 오만국에 미군비행기들이 도착해 있으며(이것은 사실이었다) 이 미 군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자유투사들에게 공수 될 탄약과 보급품들이 적재돼 있다고 보고했다.
영국과 오만정부 관리들은 이 같은 보고 내용을 받고 몹시 신경을 곤두 세웠다. 나는 할 수 없이 「크리스터퍼」 국무차관을 런던으로 보내 「대처」 수상과 「캐링턴」 의장에게 미 군기들의 진짜 목적을 설명하도록 했다. 「크리스터퍼」 차관은 미국의 특공작전 계획만 간단히 설명했을 뿐 영국 정부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는 조심성을 보였다.
우리는 모든 보도내용을 철저히 점검했다. 작전 내용이 또 새나간 듯한 뉴스가 들렸다. 이란전역의 라디오방송을 모니터 하던 우리 요원들이 이라크와의 국경 지대 근처에서 미군의 인질 구출 특공 작전이 개시될 것이라는 뉴스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놀란 우리 요원들이 이 보도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 내용은 워싱턴 스타지에 이미 보도 됐던 것과 비슷한 추측 보도였다는 사실이 판명됐다. 그 보도는 우리의 구출작전계획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밴스 국무 끝내 사표>
-특공작전이 개시되기 3일 전에 「밴스」 국무는 사실상 사임하고 말았다.
-특공작전 계획은 예정대로 착착 진행돼갔다. 나는 「밴스」 「브레진스키」 「브라운」등을 불러 의희와의 협의문제와 특공작전 이후의 사태를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인디아내폴리스에서 열린 전미감리교총회가 이란사태에 관해 「서방 제국주의」 운운의 표현을 쓴 결의안을 채택해 나는 당황했다. 이 결의안은「호메이니」 「바니-사드르」 같은 이란지도자들에게 모두 전달됐다. 「캐넌·브룩스」 목사등 3명의 감리교총회 대표들이 이번 주중에 나를 찾아와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말도록 건의하려 한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밴스」 국무더러 목사를 만나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밴스」 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대꾸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밴스」 「브레진스키」 「브라운」 모두가 내사무실을 나갔다. <일기 1980년4월21일>
더 이상 다른 말은 없었다. 비록 내일 기에는 간단히 적어놓았지만 이는 매우 심각한 사태였다. 내가 대통령으로서 내린 공식적인 명령을 면전에서 직접 거부당한 것은 「밴스」 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보면 몹시 괴롭고 무거운 부담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밴스」 의 심정을 이해 할 만도 했다. 그는 나의 보좌관들 가운데 유독 혼자서 특공작전에 반대하고 있는 외로운 처지였으며 그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밴스」는 이날 하오 늦게 나를 찾아와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나의 대 이란정책을 더 이상지지 할 수가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밴스」 의 사표를 받아 쥐고 내가 그것을 보관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두사람의 일반견해와 정치철학이 거의 비슷하며 미국의 주요외교정책에 관해서도 그다지 심각한 견해차이가 없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4월24일 봉명의 날>
우리는 또 「밴스」 가 꼭 국무장관직을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는 나중에 더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밴스」 의 결심을 돌이 킬 수 없다는 사실도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4월23일, 수요일. 나는 가능한 모든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최종적인 이란 브리핑을 받았다. 이 정보 브리핑의 요지는 앞으로 5∼6개월 안에는 인질이 석방 될 가망이 전혀 없으며 주변상황이 미군의 특공작전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테헤란시내와 그 주변에 배치된 우리요원들도 특공작전을 매우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날 저녁 나는 「르버트·버드」 상원의원 (주=상원민주당 원내총무) 과 만나 이란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면서 특히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취할 경우 의회에 필요한 통고를 해주는 문제에 관해 그의 견해를 들었다.
-나는 「버드」 에게 그 동안 언론매체에 자주 거론된 기뢰부설, 해상봉쇄 등과 같은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에 앞서 의회와 사전에 협의하겠노라고 했다.
「버드」 는 군사적 계획에 관해 협의할 필요가 있다는 말과, 어떤 형태의 비밀작전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의회에 통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기 1980년 4월23일>
나는 「버든」와 더불어 이런 형태의 비밀군사작전 내용을 사전에 통고 받아야 할 민주·공화 양당 상원지도자들의 명단을 검토했다. 나는 원래 이날 「버드」 와의 면담이 끝날 무렵쯤 해서 그에게 임박한 특공작전 내용을 알려줄 예정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심을 바꾸어 우리의 특공대원들이 실제로 작전을 개시하여 테헤란시로 침투할 태세가 완료되는 다음날 저녁때쯤에나 「버드」 와 다른 의회 지도자들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버드」 에게 군사작전이 임박했다 고만 말하고 이 작전이 언제 전개될 것인가는 밝히지 앉았다. 물론 「버드」 는 완전히 믿어도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의회의 다른 고위지도자들과 동시에 작전 내용을 통고 받기를 바라고 있는 듯 했다.
「버드」가 백악관을 떠나고 난 뒤 구출작전내용을 그에게 바로 알려줄 걸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드」 총무의 조언은 나에게 값진 내용이었다.

<작전개시일에 함구>
4월24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다.
나는 시시각각 특공작전의 모든 진행상황을 보고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외부에 대해선 아무 일도 없다는 인상을 주어야했으므로 나는 평소 일정대로 하루일과를 보내야 했다 .나는「브레진스키」에게 특공작전의 진행상황을 상세히 메모해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당초 예정대로 의회대표들을 만났고 이스라엘 노동당당수 「시몬· 페레스」 와 회담했으며 미국의 인플레이션억제정책에 관해 스페인 지도자들에게 브리핑까지 해주었다.
물론 내 마음은 온통 특공작전의 진행과정에만 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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