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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으로 돌아다닌 청와대 문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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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갈등’이 칡과 등나무의 합성어임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갈(葛)은 칡, 등(藤)은 등나무다.

 둘 다 덩굴식물이다. 오른쪽으로 칡이 덩굴을 감으면서 담장을 타고 오르고, 왼쪽으론 등나무가 올라가다 서로 만나면 얽히게 된다. 그걸 풀어내기란 매우 힘들다. 갈등이란 그래서 풀기가 어려운가 보다. 노사 갈등, 검경 갈등, 그리고 권력 갈등도 마찬가지다.

 정윤회 동향 문건 파문 속에 이런 질문을 자주 만난다. “도대체 누가 나쁜 X이야?”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상황이라 한마디로 간단하게 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숨은 그림자권력 찾기’ 수사의 윤곽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자, 까보니 별거 없더라. 십상시 모임 없었고, 결국 문건은 ‘찌라시’였다. 정윤회씨가 검찰에 들어가면서 한 말처럼 문건 유출은 경찰 정보맨들의 ‘불장난’이었다, 이상 끝. 지금으로선 이게 검찰의 결론일 가능성이 크다.

 “뭐야. 그럼 도대체 뭣 때문에 그 난리였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것 같다. 새로운 의혹이 계속 가지를 뻗고 있어서다.

 야당 박범계 의원이 또 다른 문건을 공개했다. ‘BH 문서도난 후 세계일보 유출 관련 동향’이란 제목의 보고서다. 정윤회 문건을 처음 보도한 세계일보 기자, 문건을 준 것으로 보이는 경찰청 모경감의 지난 3월 대화내용이 담겼다. 보고서의 내용을 원문은 살리되 대화체로 풀면 이렇다.

 ▶경찰청 경감=“BH(청와대) 직원 비위 관련 문서인데 보도해줄 수 있나. 내가 활용할 수는 없고 나에게 준 사람이 ‘대서특필’을 원한다. (나에게 준 사람은) MB정부 마지막 시기 BH 민정에 근무하다 작년(2013년) 초 정권이 바뀌면서 대검 범죄정보과로 복귀했다. 언론 보도를 전제로 준건데 보도만 잘 되면 계속 줄 거다. 신빙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자=“보도하겠다.”

 ▶경감=“조속한 시일에 보도해달라”(이후 기자의 휴대전화로 A4 용지 5장 분량 문건 사진 전송)“내가 대검 범죄정보과에서 받은 자료 중 오늘 것보다 더 민감한 것(정윤회 문건)도 가지고 있다. 자료를 보니 BH 이 새끼들 개판이더라. 윤창중이도 그렇고 전부 은폐하려고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 “대검 범정에 있는 분은 추가적인 자료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니 계속 줄 수 있다.”

 문건에 나온 대화가 오간 3월 말은 아직 정윤회 문건이 세계일보에 건너가기 전이다. 보고서는 이 대화를 근거로 “추가로 문건이 언론에 넘어가면 훨씬 민감한 자료라 파장이 클 테니 신속히 유출자를 처리하고, 문건을 회수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청와대 문건을) 무작위로 복사해 외부로 반출. 언론에 보도를 전제로 제공한 행위는 개인이 했다고 볼 수 없고 소위 ‘든든한 세력’이 배경이 되어 주었을 가능성이 높음”이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이 보고서는 조응천 전 비서관이 한 다리를 건너 정호성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6월께라고 한다. 하지만 청와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건을 회수하지 못했다. “청와대가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추가 유출을 막으려 했다면 ‘정윤회 문건’은 언론에 유출되지 않았을 것”(박범계)이란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청와대는 보고서 작성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도둑이 신고하든, 강도가 신고하든 문서가 대량 유출된 게 맞다면 도난당한 물건은 찾아오는 게 상식이다. 작성의도야 어떻든 말이다.

 박 의원은 “혹시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을 파악하는 것이 두려워서 (회수 노력을) 소홀히 한 게 아닌가. 그거야말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게 아니냐”고 묻는다.

 박 대통령은 사태 초반 문건 유출 행위를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했다. 어떻든 청와대는 국기문란 행위를 최소 6개월 전에 알고도 막지 못했다. 그 바람에 청와대 문건이 스마트폰 사진으로 전송돼 돌아다녔다. 창피한 문건공화국이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