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고갱, 타히티의 관능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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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이전의 섬 타히티에 숨어 들어가 창작생활을 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화가 고갱을 그려낸 이 전기물은 '동상 허물기 작업'에 충실하다. 신화화된 천재의 모습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는 대신 실제 인간에 대한 묘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점에서 현대 전기물의 새 경향에 충실하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증권소 직원에서 화가로 전직한 뒤 "내가 과연 천재 맞을까?"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사내, 마음 여린 남편이자 아버지로 나름대로 충실하려 했으면서도 허둥지둥했던 중년남자의 꾀죄죄함까지를 되살려내고 있다. 따라서 고갱이 입고 있던 신화의 옷을 벗긴 1995년 저작 '고갱, 타히티의 관능'이 '죽비소리' 도마에 오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니다.

이 책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대목이 있다. 고갱이 그 한복판을 살았던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라는 맥락를 균형있게 다루는 데 실패한 '정치적 오류'의 측면 말이다.

식민주의 시대, 즉 진보의 이름으로 타히티를 포함한 태평양 섬 등 이른바 원주민 사회를 서구사회가 어떻게 폄하하고 결국은 말살해왔나를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죽비소리'는 책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측면에 대한 뒤집어 읽기작업이다. 특히 지난 주에 소개한'야만의 역사'(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한겨레신문사) 이후 상황은 전과 같지 않은 것이다.

"1866년 영국의 한 성직자는 인종들을 세부류, 즉 미개.반(半)문명.문명으로 나눴다. 아리안족.셈족만이 문명화됐고, 나머지는 소멸의 운명에 처할 것이다. 인류의 고상한 운명을 위해…"(2백12쪽) 바로 이런 신념이야말로 '야만의 역사'가 보여준 제국주의의 논리였고, '하등인종'을 절멸시켜온 서구 근대문명의 뒤통수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 책이 아홉살 나이의 히틀러가 그런 인종주의.제국주의 신념이 담긴 책을 읽고 나중 아우슈비츠로 줄달음쳐가는 과정까지를 보여줬다면, '고갱, 타히티의 관능'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술되고 있어 유감스럽다.

즉 그 책은 끔찍했던 식민시대도 없었고, 내면의 공허함을 느낀 고갱이 타히티라는 공간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에만 초점을 맞춘다. 상황이 그러하니 타히티란 '먼 배경'일 뿐이다.

따라서 '고갱, 타히티의 관능'은 반면(反面)교사일 것이다. 번역서를 어떻게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읽을 필요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모델인 셈이다.

알고보면 앞의 책 '야만의 역사' 출현은 우연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을 썼던 에드워드 사이드 이후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만들어지면서 서구 근대의 거짓 신화들을 차례로 허물어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 탈 식민주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줬다. 타히티에 살고 있다고 고갱이 믿었던 '순박하고 관능적인 고결한 야만인'들이란 당시 서구가 동양에 대해 품고 있던 목가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16세기말 콜럼버스야 말로 그 환상의 원조(元祖)라는 것을. 즉 콜럼버스는 서인도에는 '고결한 야만인'이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으나 나중에는 '신의 분명한 계획'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이후 인디언 대학살로 이어지는 첫 문을 열었었음을.

어쨌거나 '고갱, 타히티의 관능'는 매력적인 읽을거리. 잘 짜인 고갱 전기다. 그러나 서구 독자들과 달리 한국의 독자들은 메스를 들이대며 비판적으로 뒤짚어 읽을 필요가 있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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