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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 효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1월 20일 ‘헝거게임: 모킹제이’가 개봉된 태국 방콕의 영화관 밖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한 여성.

영화에 나오는 제스처를 현실에서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다. 지난 11월 19일 태국에선 총리가 연설하는 자리에서 항의의 표시로 한 손을 들고 ‘헝거게임’에 나오는 세 손가락 경례(‘12구역 경례’)를 한 대학생들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런 제스처 금지는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를 사회 변혁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많았다. 사회운동가들은 수 세기 동안 자신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메시지를 음악이나 책, 영화에 담았다.

미국 텍사스주 사우스웨스턴대의 정치학 교수 에릭 셀빈은 뉴스위크 자매 매체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타임스(IB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상징이나 노래, 인물, 날짜는 거의 마법 같은 속성을 띤다. 대중문화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사회 변혁의 수단으로 현실과 결부시키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헝거게임’ 시리즈는 억압 받는 민중을 이끌고 폭력적인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10대 소녀 캣니스 에버딘의 활약상을 그렸다. 최신편 ‘헝거게임: 모킹제이(The Hunger Games: Mockingjay - Part 1)’는 최근 개봉됐지만 그 주제는 수 년 전부터 세계 전역의 시위대 구호로 활용됐다.

태국의 시위대는 지난 5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반기를 들며 묵언의 저항을 상징하는 표시로 ‘헝거게임’ 등장인물들이 즐겨 사용하는 ‘12구역 경례’를 처음 채택했다. 그러자 당국은 그 제스처의 집단 사용을 금했다.

지난해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프래킹(수압파쇄) 기술로 셰일가스를 추출하는 사업에 반대한 환경운동가들은 ‘헝거게임’의 상징 두 가지를 동시에 시위에서 사용했다. 시위대는 거대한 깃발에 ‘헝거게임’ 주인공의 별명인 ‘모킹제이’(Mockingjay, 가상의 새 이름) 그림과 영화에 등장하는 구호 ‘우리에게 승산은 전혀 없다(The odds are never in our favor)’가 적힌 대형 깃발을 펼쳤다. 중국에선 당국이 ‘헝거게임: 모킹제이’의 개봉을 내년 1월 이후로 연기시켰다. 홍콩에서 계속되는 반정부 시위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처럼 여러 시위대는 자신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헝거게임’의 주제를 차용한다. 그 영화가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혁명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사실이 널리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할 때는 시위의 명분과 목적을 정확히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 잘 알려진 등장인물이 자신들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혁명의 명분에 공감하기가 비교적 쉽다. 뉴욕주 시라큐즈대에서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로버트 톰슨 교수에 따르면 그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은 혁명의 개념을 곧바로 파악하고 주변에 신속하게 퍼뜨릴 수 있다.

이처럼 쉽게 소비될 수 있는 미디어는 정치적 견해를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할 수 있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게 진정한 대중문화”라고 톰슨은 말했다. “옛날이라면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 반란을 일으키기 쉬웠을지 모른다.”

‘헝거게임’에 나오는 세 손가락 경례는 압제에 맞선 묵인의 저항을 상징한다.

물론 개인적 인식이 큰 역할을 한다. ‘헝게게임’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반정부 감정을 정당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실제로 영화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그런 느낌은 일지 않는다.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 역사학 교수 티머시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예술이나 대중문화는 확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대중문화는 사회운동에 대한 반응일 뿐 동기가 되진 않는다. 오하이오대의 현대사 교수 케빈 맷슨은 사회운동과 대중문화의 관계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말했다. “순전히 대중문화로 사람들을 선동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지난 봄 대만에서 대학생들이 대중국 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하는 ‘해바라기 운동’을 일으켰을 때 그들은 인디밴드 파이어엑스에게 노래 작곡을 의뢰했다. 바로 그 ‘도서천광(島嶼天光, 섬의 일출이라는 뜻)’이 그들의 공식 시위가가 됐다. 수십 년 전엔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에서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뮤지션들은 평화를 노래했다. 관중이 1960년대 반문화운동의 일부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세르비아의 록음악은 징병제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뤘다. 반군들이 당시 독재자 슬로보단 말로셰비치의 통치에 저항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대중문화의 한 단편이 실제로 혁명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시라큐즈대의 톰슨은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예로 들었다. 미국의 노예제를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촉발했다는 설명이었다. 심지어 그 소설이 궁극적으로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그외에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는 국제 해커단체 어나니머스에게 영향을 미쳐 2008년 사이언톨로지 교회 같은 기득권 기관들이 그들의 공격을 받았다. TV 드라마 ‘윌 앤 그레이스(Will & Grace)’는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그려내 미국에서 동성애자 권익운동의 불을 지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화나 음악, 책만으로 사회 변혁을 일으킬 순 없다. 결국 변화는 사람이 일으켜야 한다. 노스이스턴대의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문화적인 요소가 사람들을 세뇌하거나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문화적 요소에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혁명과 대중문화의 상관관계
혁명이 대중문화에 영감을 주거나 대중문화의 영감을 받은 혁명을 돌이켜 본다.

‘엉클 톰스 캐빈’과 노예제 폐지운동

1852년 해리엇 비처 스토가 ‘엉클 톰스 캐빈’을 발표한 지 10년 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그녀를 두고 “남북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인”이라고 불렀다고 알려졌다. 이 소설의 사회적 반향은 매우 컸다. 작품 속의 고통 받는 흑인들이 미국 노예제의 냉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자 대중이 노예제 폐지운동에 동참했다.

우드스톡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69년 존 바에즈,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가수들은 우드스톡 공연에서 사회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었다. 우드스톡에서 공연한 뮤지션들은 대부분 반전운동가였다. 특히 전설적인 기타 거장 지미 핸드릭스는 반전의 의미를 담아 미국국가를 기타로 연주했다. 사흘 동안 열린 그 평화와 음악의 축제는 반문화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브이 포 벤데타’ 가면과 어나니머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한 가이 포크스(Guy Fawkes, 17세기 가톨릭 탄압에 저항해 ‘화약음모 사건’을 일으킨 영국인 테러리스트) 가면이 검열에 저항하는 국제 해커단체 어나니머스의 상징이 됐다. 어나니머스는 2008년 사이언톨로지 교회를 공격했을 때 가이 포크스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동시에 신원을 감추기 위해 그 가면을 썼다.

록음악과 세르비아 혁명

1990년대 세르비아의 뮤지션들은 음악으로 흉포한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정권을 비판했다. 그들의 음악은 징병제와 언론 검열에 대한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면서 대중의 저항 목소리를 대변했다. 한 참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노래가 폭탄의 수를 줄이진 못했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대중에게 전했다.”

‘레미제라블’과 홍콩의 우산 시위

홍콩의 거리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하던 민주화 시위대는 유명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주제곡 ‘민중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광둥어로 불렀다. 그 뮤지컬에서 19세기 프랑스 혁명세력은 정부와 대치한 상황에서 전투를 앞두고 그 노래를 부른다. 홍콩 시위대도 그 노래를 광둥어로 부르며 민중의 봉기를 촉구했다.

글= JULIA GLUM 뉴스위크 기자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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